상황 1. 너는 내게 “미친 것 같다”고 말했다. 내 프로필 사진 때문이었다. 반나체 여성이 뭘 보냐는 듯 서 있었다. 비뚤게 화장을 한 여성도 있었다. “제대로 된 여자 없어? 예쁜 모습도 많은데 왜 옷을 벗기고, 얼굴을 망쳐놓냐?”

  -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제대로 된 여자.’ 세 어절에서 여성을 대상화하는 너를 보았다. 옷을 갖춰 입지도, 단장하지도 않은 그녀들은 너의 프레임에서 벗어난 ‘미친 사람’에 불과했던 것이다.

상황 2. 언젠가 술자리에 간 적이 있다. 어떤 사람이 지인이란 이유로 나와 헤어진 애인을 들먹였다. 많이 취한 것 같아 무시하려는 순간, “했느냐 안 했느냐” 따위의 말을 시작으로 “나는 너 같은 여자 친구 생기면 가만히 안 놔두는데”라며 웃었다. 표정이 굳자 위로였다는 듯, “아니 그만큼 너 괜찮은 여자라고.” … 화가 나서 얘기했더니 너는 내게 뭐 입고 있었냐고 물었다.

  - 내 옷차림 때문이었나? 그 날 운이 안 좋았던 건가? 아니다. 이와 유사한 일들은 ‘실제로’ 평범한 여성들의 일상에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상황 3. 전시회를 찾았다. 멕시코 화가 프리다 칼로의 그림이 즐비했다. 사고로 하반신을 사용하지 못했던 고통, 그로 인한 유산 등이 작품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리가 가장 오래 머문 그림은 아이를 유산한 채 하혈하고 있는 자신을 묘사한 것이었다. 너는 꽤나 충격받았는지 밥을 먹으면서도 그 이야길 하더라.

  - 프리다는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자신을 보였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일들을 주제화했다. 그러면서도 그 경험에 굴복하지 않았다. 대신 고통을 극복하려는 듯 강인한 표정을 그려냈다.

 

  상황 3은 상황 2를 망라한다. 프리다를 포함한 페미니즘 예술은 여성의 경험을 승인한다. 때문에 이 예술은 삶의 맥락에서 나오는 구체적인 이야기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도는 너를 바꿔 놨다. 몇 장의 그림은, 네가, 너의 그 일그러진 시선을 인정하게 했다. 지금,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조차도 혐오를 자행하는 이 시절에, 여혐을 그려낸다는 건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궁금하다.

  상황 3은 상황 1을 망라하기도 한다. 페미니즘 예술 속 여성은 주체적이다. 그녀들은 욕망의 대상도, 수동적인 피사체도 아니다. 이는 사회 속에서 여성의 실재를 대변하고 나아가 위계 아닌 동등성을 보여준다.

  젠더 불평등으로부터 해방하기 위해선 상황을 ‘체감’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우리에겐 더 많은 페미니즘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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