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으로서 인간은 까마득한 옛날에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진 인류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사냥꾼이다. 감금된, 길들여진, 중독된, 대중화된 그리고 길을 잃은 사냥꾼이다.”

  인류학자 라이오넬 타이거와 로빈 폭스가 한 말이다. 인터넷과 스마트 폰으로 무장한 채 21세기 최첨단시대를 살아가지만 우리는 여전히 양복을 입은 원시인이고, 사냥본능을 지니고 그것을 해소하지 못해 쩔쩔매는 석기시대의 사냥꾼이라는 소리다.

  이런 시각에서 정기 고연전을 한 번 살펴보자. 사회심리학에 ‘내집단-외집단 편향’이라는 개념이 있다. 스포츠 경기가 왜 이리 흥미롭고 자주 도를 넘어 격정적이 되는지를 설명할 때 흔히 인용한다. 우리 편(내집단)은 과도하게 좋은 평가를 내리고, 남의 편(외집단)은 깎아내리는 편향된 사고를 말한다. 이런 삐딱한 심리가 우리 편에 지나치게 호의적이고 심지어 우리 편이 이기기 위해서 사생결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것만 가지고 우리가 정기 고연전을 위해서 왜 이리 막대한 물적 자원과 심리적 에너지를 쏟아 붓는지 설명할 수 있을까?

  먼 옛날 우리 조상들이 사바나초원에 살던 시절, 사냥은 호사스러운 고급 취미가 아니라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수렵시대에는 일정한 먹거리가 지속적으로 공급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작은 동물들은 물론이고, 매머드나 검치호(劍齒虎)같은 치명적인 동물들까지 사냥해야할 때도 많았다. 사냥에 성공했을 때의 짜릿한 쾌감은 위험에 비례해 컸다. 우리의 유전자 속에 사냥본능은 이렇게 깊이 각인되었다.

  세월이 흘러 농경혁명이 일어났다. 조상들은 사냥감을 찾아 여기저기 유랑할 필요가 없어졌다. 한 자리에 머물며 계절에 맞춰 작물을 재배하면 생존문제가 해결되었다. ‘피 끓는 사냥꾼’이 ‘유순한 농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끓는 피처럼 뜨거운 사냥본능은 어찌할 것인가. 유일한 해결책은 사냥을 계속하는 것뿐이다. 어떻게? 너른 들판이나 숲속에서 직접 수렵에 나설 수도 있지만, 사냥과 비슷하게 피를 볼 수 있는 투우경기나 투견, 투계 등의 유혈 스포츠를 통한 대리만족이 좋은 대안이 된다.

  유혈 스포츠가 순화된 또 다른 버전이 바로 구기종목이다. 정기 고연전에서 채택하고 있는 5개 종목도 마찬가지다. 개인적인 선호도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석기시대 야생에서 사냥감을 포획할 때처럼 규칙이 간단할수록, 신체 동작이 더 격렬한 종목일수록 인기가 좋다. 문명의 상징인 도구를 사용하는 야구(배트)나 아이스하키(스틱)보다는, 직접 손발을 사용하는 종목인 농구, 럭비 및 축구가 인기가 더 좋다. 그중에서도 덜 정교하고 억센 발을 사용하는 야성 짙은 축구가 세계적으로도 가장 인기가 좋다. 상대적으로 정교한 손만을 사용하는 농구나, 손발을 같이 사용하여 격렬한 야성을 추구하지만 규칙이 복잡한 럭비는 축구의 인기를 따르진 못한다.

  순화된 사냥본능의 해소책으로서 구기종목의 인기를 종합적으로 잘 활용하여 만들어진 것이 정기 고연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물심리학자 데즈먼드 모리스는 축구를 사냥과 대비시켜 설명한다. (일종의 평행이론인데 모리스의 견해를 다른 구기종목에 확대 적용해도 대차가 없다.) 그에 따르면 사냥의 목적이 사냥감의 획득에 있다면 축구의 목적은 골의 획득이다. 당연히 축구선수가 사냥꾼이고, 축구공은 사냥꾼의 무기다. 골대는 사냥감인 셈이다. 대결하는 양 팀의 입장으로 관점을 바꾸면 공격수가 사냥꾼이고, 수비수는 사냥감이다. 특히 골키퍼는 ‘궁지에 몰린 들짐승의 방어용 발톱’에 비유한다. 

  원활한 사냥을 위해서는 사냥에 최적화된 큰 키와 우람한 근육, 고도의 체력과 담대한 용기는 물론 여러 가지 상황에 기민하게 대처할 수 있는 좋은 두뇌와 순발력을 고루 갖춘 최고의 헌터들을 선발하여 평소에 꾸준히 훈련을 시켜두어야 한다. 운동선수들도 동일한 조건에 의해 선발되고 훈련된다. 목숨을 건 사냥의 성공을 위해서는 탁월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부족 사람 중에서 오랜 사냥 경험과 뛰어난 전략을 갖고 전술을 운용할 수 있는 베테랑 지도자를 영입해야한다. 5개부 감독과 코치가 이에 해당할 것이다.

  사냥꾼과 지도자들만 사냥에 참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냥은 집단의 생존을 좌우하는 귀중한 식량(사냥감)을 얻기 위한 투쟁인 만큼 부족원 전체가 협력해야 한다. 평소에도 사냥꾼들을 위한 특별대우가 있다. 운동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특식과 격려금을 포함한 각종 보너스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보너스는 주로 부족의 원로들이나 지도층들이 마련한다. 오늘날 대학당국의 평상시 지원과 동창회 회장단의 특별격려금 혹은 특급호텔 레스토랑에서의 파티가 다 이런 경우다.

  사냥 당일 출정식은 부족원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매우 성대하게 치러진다. 사냥꾼들이 사냥을 떠난 뒤에도 부족원은 거의 예외 없이 마을 한 곳에 모여 사냥꾼들의 안전과 무사귀환을 위해서 기도하고 즐긴다. 종교성과 축제성을 함께 띤 페스티벌이다. 오늘날은 사냥꾼에 해당하는 선수들을 직접 응원하기 위해서 후방에 남지 않고 사냥터인 운동장으로 모두 나간다. 옛날 사냥꾼들이 행했던 각종 분장과 문신, 보디 페인팅 등은 오늘날에는 운동선수가 아닌 응원자의 몫이다. 그들은 각종 깃발과 크고 작은 플래카드를 흔들며 목소리 높여 선수들을 응원한다. 사냥이 전 부족의 축제이듯이 정기전 전후는 전체 고대 구성원들의 축제일이다.

  넓은 야생의 사냥터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사냥감을 잡듯이, 그라운드에서 혹은 코트에서 선수들은 사력을 다해 골을 얻어야 한다. 사냥의 절정이 사냥감 포획이듯이, 경기의 절정은 골 획득이다. 골이 터지는 순간, 축포가 터지고 구성원들의 시간은 그 자리에서 딱 멈춘다. 대신 승리의 축가(뱃노래)와 함께 온 구성원은 혼연일체가 된다.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제의적인 융합이 이뤄진다. 핏빛 생명과 정열의 색깔, 진홍의 크림슨(crimson)이 온통 그라운드에 충만하고, 우울한 파란색(melancholy blue)은 더욱 우울해진다.

  그 이전까지 고려대 00학과 00학번 000라고 규정되었던 한사람, 한사람의 개체성은 온데간데없다. 그 순간 그들은 고대인의 이름으로 하나다. <군중과 권력>의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한 ‘방전’의 순간이다. 방전이란 구속 상태로부터의 해방 혹은 에너지의 폭발과 방출을 말한다. 카네티는 말한다. “군중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방전이다. 그 이전의 군중은 본질적으로 군중이 아니다...방전의 순간에 군중의 모든 구성원은 그들 사이의 차이를 제거하고 평등을 느끼게 된다.” 이 순간 옆에 서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하등의 의미가 없다. 모두가 고대인이란 이름으로 방전된 군중의 일부일 뿐이다. 자연스럽게 스크럼을 짜고 노래를 부르고 함성을 지르며 하나가 된다.

  “우리 오늘 만난 것은 얼마나 기쁘냐. 이기고 지는 것은 다음다음 문제다.”라고 지조의 시인 조지훈은 노래했다. 하지만 아무리 멋있는 말로 포장해도 경기에 일단 임하면 승리라는 목적보다 우월한 것은 없다. ‘크림슨의 붉은 정열’과 ‘솟구치는 날래고 용감한 기세’로 ‘천지를 흔들어라 젊은 피’여! 사냥에 실패한 사냥꾼이 부족원의 식량을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우울해 지듯이, 운동에 패배한 선수들은 기가 죽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고대의 멋진 사냥꾼들이여! 이번에도 반드시 사냥에 성공하고 돌아오라!

  우리는 먼저 집으로(참살이길) 가서 ‘필승, 전승, 압승’의 개선가를 부르며 귀환할 그대들, ‘장안을 뒤흔드는 젊은 호랑이’들을 위해, 그 옛날 사냥꾼의 아내들이 그랬던 것처럼 큰 잔칫상을 준비할 것이다. 온 부족원이 어깨 걸고 신명나게 한바탕 놀아 보자. 그날 하루만은 조금 오버해도 좋다. 기차놀이도 좋다. 안암골이 떠나가도록 외쳐도 좋다. 통음대취(痛飮大醉)도 좋다.

  도를 넘지 않는 일시적 일탈, 일시적인 난장(亂場)의 황홀한 시간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냥감을 나눠들고 사냥꾼들이 각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말이다. 우리처럼 이토록 멋진 의미 깊은 재생과 화려한 부활을 해마다 경험하는 행운아들은 지구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사냥본능의 멋진 해소의 한마당인 정기 고연전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김진국(작가. 융합심리학연구소장. 심리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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