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한 여성이 강남 한복판에서 ‘여성’이라는 이유로 살해당했다. 정부와 언론은 사건을 정의하려 이리저리 헤맸다. 그러는 사이 여성들은 강남역을 찾았다. 포스트잇을 붙이며 피해자의 고통을 통감했다. 그리고 고백했다. ‘나는 오늘 우연히 살아남았다’고.

▲ 사진 | 조재석 기자 here@

여성들의 고백은 추모에서 그치지 않았다.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혐오가 기반이 된 페미사이드(Femicide, 여성살해)’라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성폭력 사건이 아니었음에도 수많은 여성들은 길거리 필리버스터를 통해 지난날 겪어왔던 개인의 억압과 차별의 역사를 공유했다. 온라인에서도 커뮤니티를 통해 집단화가 이뤄졌다. 여성들이 연대하기 시작했다. 손을 잡고 함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여성들은 한 목소리로 외쳤다. “지금 당장 여성혐오를 멈춰라.”

여자와 남자의 싸움이 아니다
당시 추모현장을 찾은 여성 추모객들은 ‘피해자가 여성이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며 사회에 배어있는 여성 혐오를 지적했다. 하지만 일부 남성들은 ‘남과 여를 편 가르지 말고 사이좋게 추모를 해야 한다’거나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지 말라’며 이에 맞섰다.

페미니즘 활동가들은 남녀대립 구도의 프레임으로 현상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개설된 ‘강남역 10번 출구’ 페이스북 페이지의 이지원 활동가는 “여성들이 말하는 여성혐오는 남성 중심적인 사회구조에서 비롯된 차별과 멸시를 지적하는 미소지니(Misogyny)의 개념”이라며 “‘남녀 대립’ 혹은 ‘남성 혐오’라는 단어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한국 사회가 기본적으로 여성혐오 사회이자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여성과 남성이 논쟁을 벌이는 층위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본교 페미니즘 학회 여정의 김승경 학회장은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여성들은 그들의 공동적 고민을 고백하며 한국 사회의 문제를 제기했지만, 이에 대한 반응이 ‘남성을 일반화하지 마’라는 식의 성 분리로 귀결됐다”며 “문제에 대한 공감보다 지적에 대한 방어가 더 컸기에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차별을 금지하는 법안 필요
올해 6월 정부는 ‘여성대상 강력 범죄 및 동기 없는 범죄 종합대책’을 발표했다. 발표된 종합대책은 △남녀화장실 분리설치 의무화 △비상벨 설치 △정신질환자 행정입원 조치 등의 내용을 골자로 한다. 하지만 종합대책이 발표되자, 한국성폭력상담소를 포함한 7개 여성단체는 “사건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섣부른 대안”이라 지적하며 대책안의 전면 폐기를 주장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종합대책이 공개되자 대책안의 재검토를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성별에 따른 공간의 분리는 자칫 ‘안전하지 않은 공간에 간 피해자’에게 책임을 지우는 등 혐오폭력의 정당화가 될 수 있다”며 “핵심은 우범지역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공간을 잠식한 여성혐오”라고 밝혔다. 종합대책 반대 서명에 참여했던 권순민 석순 편집장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은 사회 전반에 만연해있던 여성 혐오와 폭력적인 문화가 발현된 사건인데 단순히 가해자의 정신 병력을 문제 삼는다거나, 공공화장실이라는 장소를 운운하는 것은 껍데기만 지적할 뿐 정작 고쳐야 할 본질은 은폐하려는 시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여성단체는 종합대책 폐기를 요구하며 대안으로 ‘차별금지법 도입’을 주장했다. 차별금지법은 사회에서 성별, 병력, 종교, 장애, 성적지향 등의 이유로 일어날 수 있는 배제와 멸시를 법적으로 금지한다. 언니네트워크 야릉 활동가는 “물론 차별금지법 도입만으로 한국 사회 전반에 스며있는 차별을 걷어낼 순 없겠지만, 국가가 여성혐오를 포함한 소수자 혐오를 차별로 인식하고 있으며 평등을 지향하고 있음을 상징하는 지표는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강남역 10번 출구 이지원 활동가는 “정부는 수많은 여성들이 왜 강남역 살인사건을 자신의 문제로 느끼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며 “차별금지법과 함께 온라인에서 행해지는 ‘약자 및 소수자 대상 혐오표현에 대한 페널티’도 하나의 구체적 방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부당함’을 파악하며 시작해야
전문가들은 정책 도입보다 더 중요한 것이 개인의 인식 변화라고 말했다. 이나영(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자신의 소속 단체에서 부당함을 찾는 것이 ‘나의 페미니즘’을 시작하는 첫 단계라고 전했다. 그는 “성별이나 인종 그리고 성적 지향 등에서 비롯된 차별의 구조들이 학내에서 가시화될 때 용감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이 페미니즘의 시작”이라며 “당장 내 일이 아니더라도 함께 그 자리에 있어 주고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언니네트워크 야릉 활동가는 여성의 페미니즘 못지않게 ‘남성의 페미니즘’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남성들이 어렸을 때부터 들어왔던 가장의 역할과 남자다운 행동에 대한 강요를 거부하는 것도 페미니즘이 될 수 있다”며 “‘가장’과 ‘남자다움’이 남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변화한다면, 사회 구성원 모두가 더 주체적인 인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페미니즘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진정한 민주주의는 없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나영 교수는 “강남역 사건 이후 2016세대가 보여준 모습은 더 이상의 명시적, 비명시적 차별 구조를 용인하지 않겠다는 발화의 시작”이라며 “페미니즘을 향한 진지한 고찰이 없다면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은 그저 허망한 담론이자 수사에 불과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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