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 복무 중일 때, 한 군사재판에 정병으로 참여했다. 두 명의 간부가 찜질방에서 여자 한 명을 성폭행한 사건이었다. 두 명의 피고인은 재판 내내 억울함을 호소했다. 피해자가 먼저 접근했지만 갑자기 돌변해 피해자인 척 연기한다는 것이다. 결국 피해자는 법정에 소환됐다. 성폭행 피해자가 증인으로 나설 때 피고인과 마주치지 않도록 피고인은 잠시 격리시킨다는 원칙으로 인해 피고인 둘은 잠시 법정을 벗어났다. 방청석에 있던 참관인들도 자리를 비워야만 했다.

  피해자의 증언이 시작됐다. 피해자는 범행의 과정과 심경을 빠짐없이, 그리고 흐느끼며 이야기했다. 재판부, 검사, 정병들만이 남아있던 법정 안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다. 피고인의 체취가 남아있는 법정 안에서, 피해자는 한참을 울었다. 피해자에게는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남긴 채 피고인들은 징역형을 받았고 재판은 끝났다.

  두 명의 피고인, 아니 가해자는 억울함을 주장했다. 그 억울함으로 피해자는 법정에 나와 증언할 수밖에 없었고 성폭행으로 받은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두 사람의 억울함이 한 사람의 억울함으로 바뀌었다.

  ‘억울함’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정서 중 하나다. 그 감정은 재판에서 더욱 강해진다. 재판정에 오는 사람들은 재판에서 이기든, 지든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 이유는 셀 수 없이 많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피고인의 사정을 전방위적으로 고려하는 관습이다. 초범이라는 이유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은 감형을 받는다. 열 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죄 없는 자를 벌해서는 안 된다는 형사소송 기본 원칙의 보호를 받는 피고인들은 맘 편히 억울함을 호소한다. 그 억울함으로 피해자와 가족, 혹은 또 다른 누군가는 억울해한다. 연기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사람들의 억울함을 보호하려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정작 보호받아야 할 사람들이 분노하고 슬퍼한다. 얼마 전 학내에 있었던 ‘페이스북 그룹 성희롱’ 사건에서 ‘고추밭’ 그룹 개설자는 피해자대책위원회로부터 자신의 인권이 유린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어떠했나. 또 다른 억울함을 낳았고, 분노를 낳았다.

  그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억울한가? 그렇다면 당신이 억울해함으로 다른 사람이 억울해하지는 않나, 분노하지는 않나 거울 속에 당신들의 모습을 비춰봐라. 누군가 억울해 할 사람이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말 억울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억울해하지 마라.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