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도전이 가득한 세대, 20대. 그리고 그 20대를 부르는 청년이라는 단어. 하지만 청년, 우리가 사회에서 갖고 있는 이미지는 암울하기만 하다. 대학 등록금 내기도 버거워 아르바이트와 학업을 힘들더라도 같이 해야만 하는 세대, 취업 문턱이 높아 쉽게 취업하기 힘들고 취직하더라도 비정규직으로 일해야 하는 세대, 또 한편으로는 도전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는 세대. 그런 세대가 바로 우리 20대였다.

  가끔은 우리에게 따끔한 지적이 오곤 한다. 한 칼럼니스트는 ‘욕심과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늙음은 추하지만, 욕망하지 않고 갈구하길 포기한 젊음도 어색하다. 갖지 못할 걸 알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해 내달리고, 그 때문에 상처받아도 하는 게 젊음의 본질 아닐까.’라고 도전하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비판했다. 하지만 묻고 싶다. 왜 우리 20대는 욕망해야 하고 갈구해야 할까? 왜 갖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포기하면 안 될까? 우리는 상처받아도 괜찮은 존재들인가? 20대 700만 명은 모두 다른 사람들인데 왜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려져야 할까? 이질성은 무시된 채 동질성만이 강조돼야 하는가?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중략)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 불러.’ 장강명 작가의 <표백>이라는 소설 중 일부다. 이 소설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흰색이다. 다른 색이 하나라도 생기면 바로 티가 나는 그런 새하얀 색. 현실 속 세상도 마찬가지다. 젊음과 청춘을 즐길 여유도 없이 세상이 정한 틀 안에서 살아간다. 잠시 여행을 가든, 휴학을 하고 쉬든 다시 원래의 틀 안으로 들어올 뿐이다. 다른 색을 나타내려고 하면 곧바로 우리는 다시 ‘표백’된다.

  이번 대선에서 우리들은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됐다. 각종 일자리 정책, 대학 정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도 마찬가지다. 일자리 81만 개 창출, 입학금 폐지, 반값 등록금 등의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공언했다. 대통령의 공언이 표심을 얻기 위한, 우리를 조금 더 쉽게 흰색으로 만들기 위한 정책이 아니길 빈다. 당장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을 정책을 통해 해결해야겠지만, 그것들이 이 흰 세상을 우리들만의 다양한 색깔로 채워나갈 수 있게끔 자유를 주는 그 시작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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