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고기를 사오라고 했다. 퇴근이 늦을 것 같다고 말하자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니 밤늦게까지 먹어도 괜찮다며 떨이 하는 고기를 실컷 사오란다. 평소 그녀에게서 볼 수 없었던 밑도 끝도 없는 긍정이다.

정치성향이 또렷한 아내는 이런 날은 먹고 마시며 축하해야 마땅하다 말한다. 나는 그 의견에 반대다. 물론 나도 오늘 있었던 일이 기쁘긴 했으나 일부러라도 성대해하고 싶지 않았다. 원인이 어찌됐듯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워해야할 일이며 우리들도 그 결과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으니까. 그런 우리가 맞은 씁쓸한 결과에 대해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도 탄생한 것 마냥 온 나라가 떠나가랴 축하하는 모습은, 내 입장에선 썩 유쾌하게 비춰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내 발걸음은 대형마트 정육점 코너를 향해 있었다. 유쾌하고 안 하고를 떠나, 나도 간만에 고기가 먹고 싶었으니까.

“마감 세일입니다! 고기 한 근에 50% 반값에 모시겠습니다!”

정육코너에 내 걸음이 가까워지자 나를 발견한 정육점 직원들이 큰 소리로 외친다. 마감 직전 정육코너는 흡사 훈련병 시절 유격장 조교들을 떠올리게 한다. 고함이라기보단 악에 가까운 그들의 목청은 귓불이 떨릴 정도로 얼얼하다. 고기의 신선도와 그들의 볼륨은 반비례하는 걸까.

아내가 사오라고 한 목살과 삼겹살을 집어 계산대로 갔다. 무게를 재고 가격표를 붙여 봉지에 고기를 담아주는 한 직원. 하얀 정육용 앞치마와 모자를 써서 처음엔 내가 잘못 봤나 싶었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십쇼.”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내 기억 깊숙한 곳에 잠들어 있던 까만 기억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이윽고 그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내가 알고 있던 오성, 허오성이 맞았다.

 

 

 

오성은 성적이 안 좋았다. 특히 문예사조사, 현대문학론 같은 이론 수업 성적은 바닥을 쳤고 아예 수업을 안 나오는 날도 허다했다. 그렇다고 창작 수업의 성적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아니, 확실히 그는 창작실력은 좋았다. 소설 창작이든 시 창작이든 시나리오든, 자기만의 뚜렷한 문체가 있고 글 속에 확고한 철학을 담아 특유의 이야기를 썼으니까.

오성의 글은 같이 수업 듣는 몇몇 학생들을 팬으로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건 극소수의 이야기. 대부분 ‘뭘 말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극적인 요소는 없고 너무 철학적인 이야기만 많다’, ‘인물이 평면적이다’ 등 그의 작가적인 색을 침범하지 않는 하에 글의 전체적이고 객관적인 문제를 피드백 해주었으나, 오성은 한 귀로 흘리기 일쑤였다. 고칠 마음이 전혀 없기 보단 고치더라도 자신의 생각이 바뀌어야 고치지, 다른 사람들에게 피드백을 받았다고 그걸 고스란히 고치고 싶진 않다는 식이었다. 객관적인 피드백에도 퉁명스럽게 나오는 그의 스타일에 그는 학과 내에 적을 많이 두곤 했다. 교수님들 또한 글 자체는 잘 쓰나 ‘변화’가 없는 그의 학습태도에 차마 후한 점수를 내주진 못했다.

‘졸업 후 딱 십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

그가 대학 사년 다니는 내내 입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말이었다. 입학할 땐 창작에 열의를 갖다가 고학년이 되면 슬슬 예술가 가면을 벗고 출판자격증, 토익, 공무원 시험 등 현실 바라보게 되는 다른 학생들에 비해 오성은 졸업이 가까워질수록 그 말을 하는 게 잦아졌다. 오성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뭉쳐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외톨이 늑대기도 했고 한번 결정한 건 미련하게 잡고 늘어지는 곰 같은 인물이기도 했다. 오성이 고학년이던 어느 날, 친한 사람들이 모두 모인 어느 자리에서 그는 두서없이 선언했다. 자기는 유하 시인 같은 영화감독이 될 거라고. 문창과생이 영화감독이라니. 황당무계한 한편, 정말 오성다운 선택이라 생각했다.

 

나도 시작은 그와 비슷했다. 어렸을 때 글 쓰는 것을 좋아했고 꿈은 언제나 작가였다. 후대에 길이길이 남을 걸작 소설을 쓰기위해 전문적인 창작법을 배우고 싶었다. 그래서 입시 때도 한 치의 고민 없이 문창과를 선택해 입학하였다. 뭐든 간에 열심히 했다. 학점도, 창작도, 학교생활도. 그래서인지 고학년이 됐을 즘엔 그간 선후배, 동기들에게 인정받은 걸 바탕으로 학회장직까지 맡게 되었다.

머지않아 나 또한 예술가 가면을 벗어야 하는 부류의 학생 측에 속한다는 걸 알게 됐다. 오성이 아니더라도 나보다 글 잘 쓰는 사람은 우리 과에만 해도 널렸다. 잘 다듬어지고 색깔이 뚜렷한 그들의 작품을 보노라면 나도 열심히 써야지, 가 아니라 나는 도무지 저렇게 쓸 자신이 없다, 라고 느껴버린 것이다.

어떤 거장 작가가 말하길 천재와 정면승부를 하지 말라고 했다. 산다는 건 장거리 경주지 단거지 경주가 아니라고. 꾸준히 한 걸음 한 걸음 달리다보면 어느새 벽을 만나 멈춰있을 천재를 추월해 있을 거라고. 말 그대로 잘난 사람 보며 좌절할 시간에 꾸준히 노력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운동화나 런닝화를 신고 달리고 있었을 때,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그게 내 창작실력이었다. 벽을 마주한 천재를 만나기 전에 나는 범재들부터 쫓아야했고 또 그런 주제에 꾸준히 노력할 근성도 없어 매번 벽에 부딪쳤다.

그렇게 창작활동은 그냥 취미로 남겨두기로 하고 졸업하자마자 한 출판사의 잡지부서에서 인턴으로 일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직원만 되면 다시 창작을 하자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좀 더 모으고 그만두자, 안정적일 때까지만 하자는 식으로 늘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편집 일을 하며 부업으로 창작을 하겠다는 결심은 마음 한 귀퉁이에서 조용히 먼지가 쌓여갔고, 차마 그 마음을 부활시키기보단 이따금씩 그 먼지를 털어내는 정도만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혼까지 했다. 집이 생기고 차가 생기니 책임감은 더욱 커져갔다. 그나마 존재하고 있던 창작 열의는 먼지더미에 파묻혀 형태를 잃은 지 오래였다. 그도 그럴 것이 한편으로는 나도 이 일에 재미를 느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아하지 않더라도 잘하는 것을 쫓아가다보면 좋아질 수밖에 없다고 하던가. 직접 발로 뛰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걸 글로 적고 문장을 다듬어 종이로 찍어낸다는 편집 일에 나도 모르게 보람을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오길 십년, 운도 잘 따라주어 나는 편집장이 되었다. 어느 출판사의 잡지 한권이 나로 하여금 좌지우지 되게 된 것이다. 십년 전 작품 하나 잘 써보고 싶다고 열등감에 빠져 살던 학창시절이 인색하게 나는 창작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보란 듯 성공을 거뒀다.

많은 이들의 인정, 빠른 승진, 무난한 재력사정과 결혼. 모든 것이 안정적으로 차곡차곡 쌓여갔지만 나는 공허했다. 오랜 시간 꾸어온 꿈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 그것이 망령처럼 달라붙어 떠날 줄을 몰랐다.

오성을 늘 도운 건 그 때문인 것 같다. 대학 시절부터 가장 아끼는 후배기도 했지만 안정적인 길을 포기하고 험한 창작의 길을 묵묵히 가는 그에겐 묘한 고마움을 느꼈다. 우리가 현실을 쫓느라 지켜내지 못한 것을, 이십대 초반 그 마음 그대로 변치 않고 지키는 모습이 듬직한 수문장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인턴 때부터 그가 밥을 사달라면 사주고, 술을 사달라면 사줬다. 내가 그보다 나은 건 약간의 재력뿐이었으니까. 나는 그럴 때마다 오성에게 좋은 작품을 만들어 보답하라고 했다. 그건 과거의 나에 대한 일종의 사죄 같은 것이었다.

 

2014년 3월 어느 날. 출근하자마자 전화 한 통이 왔다. 모르는 번호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유일대학교 문예창작과 학회장 13학번 배현수라고 합니다. 변지원 선배님 휴대폰 맞으십니까?”

내가 졸업한 학교에서 온 전화였다. 학교에서 전화가 오는 건 축제 시화전 초대나 문창인의 밤 같은 졸업생 초대 행사 때밖에 없다. 아직 3월, 이들의 전화가 오기엔 너무도 이른 시기. 불안함이 밀려왔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 문예창작과가 학교구조조정으로 인해 이번에 일방적인 폐과통보를 받았습니다. 학교 측은 저희와 소통을 일절 거부한 상태라 이대로 가면 아무 저항 못하고 폐과처리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입니다. 현재 학생들은 광화문 및 정부청사에 수업거부시위를 하러나간 상태고 저는 전 학생회 임원분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중입니다. 변지원 선배님께선 문화예술잡지 <POP&U>의 편집장으로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습니다. 저희가 지금 선배님 문자로 폐과 반대 관련 선전문을 보내겠습니다. 부디 개인 SNS나 전달을 통해 동기선후배분들이나 예술, 출판계 인사께 이 사실을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저희 학과의 존폐가 걸려있는 문제입니다.”

마치 쓰여진 대본을 읊는 듯한 목소리. 나 이외 사람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있는 다른 학생들의 통화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비집어 들려왔다. 내가 알겠다고 하자 학회장은 감사하다며, 문자메시지 확인을 꼭 부탁한다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일분이 좀 넘는 짧은 시간 통화동안 믿기지 않는 사실을 들었다. 몇 년 전에 한 명문대학교 문예창작과와 국어국문과와 통합된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그건 그냥 그 학교 내부 사정이라고 생각했건만 구조조정이란 건 너무 빠르게, 많은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문자메시지가 왔다. 학회장이 보낸 선전문이다. 사진파일로 된 그 한 장의 사진엔, ‘학교의 일방적 통폐합, 학생들만 죽어난다!’ 라는 큰 글씨를 중심으로 학회장이 쓴 긴 항소문과 구조조정 진위가 쓰여 있고, 그 아래에 학생들의 시위 사진이 찍혀 있었다.

휴대폰을 들었다. 내 휴대폰에 저장된 동기, 선배, 후배의 모든 번호를 모아 단체 톡방을 만들었다. 그 파일을 전송해 학회장이 말한 대로 자신의 SNS와 다른 예술계 인사들에게 알려달라 부탁하는 톡을 보냈다. 사진을 보낸 지 채 일분도 되지 않아 반 정도가 확인했고, 삼분의 일 정도가 우르르 방을 나갔다. 남은 이들 중에선 말도 안 된다며 분노하는 이들도 있었고, 간만에 동기 선후배들을 만나 반가운지 태평하게 오랜만이라며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아직 한사람 남았다. 단톡방 알림을 끄고 전화번호부를 켜 오성의 번호를 찾았다. 오성은 SNS를 하지 않는다. 학창시절에도 다들 하던 싸이월드나 문자메시지 같은 건 일체 안 했다. 필요한 말이 있으면 항상 전화를, 목소리를 통해 하기를 고집했다. 사람 간에 글로 하는 연락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나.

 

 

 

‘졸업 후 십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겠다.’

늘 하던 말이었으나 요즘엔 과연 십년을 다 채울 수나 있을지가 걱정이다. 이제 겨우 칠 년. 마땅히 이룬 것도 없고, 이루어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다. 일 년에 한 편씩은 독립영화를 찍었고 한국영화아카데미(KAFA) 입학시험을 매년 보았다. 내가 문예창작과 출신이라 그런 걸까. 물론 출신이 여타 영화 영화방송과, 연극영화과 감독들에게 밀리는 경향이 있는 건 사실이다. 아무리 권위 없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계라도 인맥의 힘을 무시할 수 없으니까.

얼마 전엔 오래 사귀던 애인과 끝내 헤어졌다. 학창시절부터 사귀었던 그녀는 처음엔 창작에 열의를 갖는 내 모습을 사랑했다. 대중을 꿰뚫기보단 내 자신을 위해 글을 쓰던 고리타분한 나의 글을 좋아해준 몇 안 되는,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열혈 팬이었던 그녀. 내가 창작할 때 모습이 가장 멋있다고 말하던 그녀. 내가 어떤 걸 찍든 무조건 잘한다, 재밌다고 말하며 내가 가는 길을 한없이 응원해주는 단 한사람.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그녀인지라 나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녀 덕에 적당한 원룸을 얻었고 삼시세끼 굶을 일은 없었다. 아마 그녀를 만난 후를 기점으로, 나는 더욱 견고한 독고다이가 되어간 것 같다.

몇 년 전부터 계속됐던 슬럼프(혹은 게으름)는 시간이 지나도 가실 줄을 몰랐다. 영화의 부진, KAFA의 불합격증이 쌓이고 쌓이자 무기력함이 나도 모르는 새 어깨 위에서 테트리스처럼 차곡차곡 쌓이고 있던 거다.

이런 한심한 모습일지라도 그녀는 날 믿어줬다. 나 또한 그런 그녀의 이해심이 고마웠다. 하지만 그 기간이 너무 길어지자, 그녀는 이제껏 없었던 잔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난 일어설 수 없었다. 아니, 일어나기가 싫었다. 지금 일어서면 금방 또 넘어질 것 같은 느낌을 받았으니까. 그러다 그녀에게까지 소홀해지자 그녀는 내 앞에서 우는 날이 많아졌다. 그녀의 장마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던 얼마 전, 더 이상 버틸 수 없는지 그녀는 바뀐 번호로 응답했다. 마침 그녀가 해준 내 원룸 계약이 끝날 시점이었다.

수중의 돈을 모아 겨우 구매한 신림동 어느 한 구석, 다 쓰러져 가는 다섯 평짜리 고시원. 그리고 육년 된 구식 노트북. 내 전 재산은 오직 이것뿐이었다. 한 순간에 모든 걸 잃어서인지 혹은 예기치 못한 이별을 맞아서인지, 칠년 동안 느껴본 적 없던 좌절감, 무력함이 한 번에 몰려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내가 그동안 별 탈 없이 반 백수 영화감독생활을 할 수 있던 건 그녀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늘 기고만장했던 나는, 정작 받쳐주던 것이 사라지자 나 자신이 이렇게 무기력한 인간이었단 걸 비로소 체감하고 만 것이다.

몇 시간 내내 바닥 장판무늬만 빤히 보고 있다. 그녀 아닌 다른 사람에게서라도 투자를 받아 영화를 찍어야 한다. 투자를 위해선 빼어난 시나리오를 써야한다. 그러나 쓰기 싫었다. 그럴 힘조차 나지 않았다. 배고팠지만 먹고 싶지 않고, 오줌보가 꽉 찼지만 일어나기 싫었다. 어쩌면 이대로 바닥과 융합될 것 같은 무의미함을 느낄 즈음, 전화가 울렸다. 지원 선배다.

 

…….

 

“알았지? 칠 년 동안 했으면 너도 영화판 짬 좀 될 거 아냐. 문자 메시지로 학회장이 보낸 사진 보낼 테니까 그 바닥에서 유명한 감독이나 각본가 몇 명한테라도 좋으니 꼭 좀 알려줘. 물론 니가 수업시간마다 교수님이랑 많이 다투긴 했지만 그래도 우리 모교 아니냐? 꼭 좀 부탁한다. 조만간 밥 한번 먹자. 고생해.”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내 정신도 잠깐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폐과라니? 학과 하나가 무슨 사람 없는 과목 폐강되듯 한 순간에 없어져도 되는 건가? 지원 선배에게서 도착한 문자메시지를 봤다. 긴 선전문, 그 아래엔 시위하고 있는 학생들의 사진이 보인다.

일단 나름대로 친한 감독, 내 영화에 출연했던 그나마 인지도 있던 배우들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답장은 오지 않는다. 시대가 시대인데 아직도 문자메시지를 사용해서일까? 아니면 그들과 나의 관계는 영화를 찍는 동업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까?

노트북을 켜 우리 학교 문예창작과를 검색해보았다. ‘학생들의 분노’, ‘문예창작과를 지켜주세요’ 등 제목의 독립 언론사 기사 한두 개가 올라와있다. 쭉 기사문을 훑어보던 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우리 학교뿐 아닌 전국 많은 학과들이 폐과위기에 놓여있다는 문장이었다.

혹시 몰라 ‘폐과’, ‘구조조정’이란 단어로 다시 검색했다. 그러자 국어국문학과, 연극과, 스포츠학과 등 많은 인문예술계열 학과들이 통폐합 된다는 소식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다들 한 달 이내의 기사였다. 구조조정 당하는 학교가 이렇게 많았나? 심지어 이름만 들어도 아는 명문대의 어느 학과도 취업률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다는 기사도 있다. 비단 우리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이 시간에도 전국 규모로 많은 대학생들이 대학구조개혁이라는 이름으로 구조조정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학교에 적을 뗀지 칠년이 지났지만 마치 내 일처럼 다가왔다. 물론 내가 지원 선배처럼 학교생활을 즐겁게 한 것도 아니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성적으로 졸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내내 공부에 시달리던 힘든 십대를 끝내고 맞이한 사회의 첫 걸음을 ‘구조조정’이라는 이름으로 은퇴를 앞둔 중간관리직이나 해야 할 걱정을 하게 만드는 건 엄연한 사기이자 갑(甲)질이다.

여전히 아무에게서도 답장이 안 온다. 무력했다. 졸업생으로서 후배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퍼뜨리는 것조차 못했다. 서른넷 먹고도 쌓아놓은 건 없는, 할 줄 아는 거라곤 글 쓰고 영화 찍는 거밖에 모르는 반 백수가 지금의 내 모습이었다.

 

……!

 

뇌가 무언가에 맞은 느낌이다. 아니, 맞긴 맞았는데 막혀있던 곳에 구멍이 뚫려 뇌 속에 고인 물이 빠져나가는, 어딘가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생각났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그리고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이.

요 몇 년간 영화를 만들 용기가 나지 않은 건, 기똥찬 시나리오가 나오지도 않고 함께 해줄 스태프도 잘 구해지지 않아서였다. 허나 굳이 그것을 따라갈 필요가 없었다. 현실에 나타난 비현실적인 사건, 이거야 말로 소재 그 자체다. 배우도 스태프도 필요 없이 나 혼자서 찍을 수 있는 장르의 영화가 있다. 1인 다큐멘터리 영화다. 이 상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찍어 영화제에 출품한다면 대학구조개혁으로 시끌벅적한 사회에 센세이션을 일으킬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또한 이제껏 일반 영화에서 번번이 실패했던 내가, 다큐멘터리에서 성공을 거둔다면 이 또한 내가 새로 개척할만한 길이 되는 것이다.

작년 기사를 보니, 구조조정은 대체로 3~4월에 이루어졌다. 한마디로 이 달이 끝나면 소재가 될 만한 사건은 찍을래야 찍을 수 없는 상황. 지금 당장 시작해야했다.

그러나 수중엔 한 푼도 없었다. 영상을 찍을 장비 대여비, 제작비조차 없는 실정. 제작견적을 재보니 대략 200만 원 정도. 이 거금을 어디서 투자 받을 것인가. 감독이란 결국 투자자에 의해 굴러가는 직업인데, 전 여자친구의 아낌없는 지원에 나는 그동안 그들과 담을 쌓고 살았다. 적당한 재력을 가지고 있되 나에게 아낌없는 투자를 해주는 사람…… 단 한사람밖에 없었다.

 

“갑자기 찍으려는 이유는?”

“우리 학교를 포함해 구조조정 위기에 있는 학교들을 대변하고 싶어서요.”

지원 선배는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피우기 시작했다. 역시 돈이 많고 적고를 떠나 아무리 친한 후배라도 그런 거액을 순순히 주기는 부담이 되겠지. 하지만 일일이 궤변을 늘어뜨려 놓으며 돈을 받아내고 싶지는 않았다. 무기력하게 구조조정 당하는 대한민국 학교들을 대변하는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면 이 처사는 전혀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거다.

이윽고 담배를 다 핀 선배는 나에게 종이 한 장과 펜을 건네주었다.

“200만원이라고 했지? 계좌 써.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냥 좋은 영화 만들어서 보여줘. 우리 과 꼭 지켜줘라.”

나는 정말로 아무 말 없이 계좌를 또박또박 적었다. 그는 내 손을 꼭 잡고 다른 손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부끄럼 없는 얼굴빛은 여전하구나.”

조용히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주변 직원들이 이런 내 모습에 상당히 적잖이 당황한 듯 쑥덕거렸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사무실을 나왔다. 그 길로 바로 장비 대여를 위해 낙원상가로 향했다.

 

마스크엔 X자가 있었다. 자세히 보니 검은색 테이프를 잘라 얼기설기 붙인 거다. 학생들은 저마다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보고 싶다 15학번’, ‘취업은 예술의 끝이 아니다’, ‘창의성을 무시하는 대학은 공장과 다를 바 없다’ 등 문창과답게 창의성 있는 시위구호들이 굵은 글씨로 쓰여 있다.

이곳은 정부청사 앞 담벼락. 그리고 시위하고 있는 이 무리는 내 모교 문예창작과에 재학 중인 학생들이다. 이들이 지금 하는 건 침묵시위라 하여 저런 모양의 마스크를 쓰고 조용히 피켓을 든 상태로 아무 말 없이 서너 시간 동안 가만히 서있는 것이다. 담벼락 아래 일렬로 늘어서 있는 게 언론사에서 사진 찍어가기도 딱 좋은 그림이다.

여기에 와 있는 다른 마이너 언론사 기자들처럼 일단 촬영 앙해를 구해야 했다. 이 긴 행렬의 끝에, 마스크를 쓰지 않는 한 학생이 보였다. 혼자만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는 게 아마 학회장처럼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 저는 선배이자 독립영화 감독인데, 촬영을 해도 되겠냐고 묻자 흔쾌히 허락했다.

“그럼 현재…… 학교 내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죠?”

“학교는 저희와의 대화를 계속 거부하고 있어요. 학생지원처에서 총장 면담신청서를 내서 면담약속을 잡으라고 해서 그렇게 했는데, 총장실 조교를 통해 스케줄이 바쁘다는 이유로 만날 수 없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보시는 것처럼 수업 거부 시위밖에 없고요. 삼십년 전통의 학과를 학생들 의견 청취도, 교수 협의도 없이 며칠 만에 없애기로 결정한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삼십년 전통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아무 협의 없이 소통을 끊는다, 이건 일방적인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이야기였다.

“그럼 학교 측에서 요구하는 건 학과의 폐과인가요?”

“정확히 말하면 통폐합이에요. 선배…… 아니 감독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학과는 예술학부잖아요? 근데 통폐합을 디지털미디어학과랑 합하라는 거예요. 어처구니가 없죠. 문예창작과랑 디지털미디어학과는 전혀 다른 계열의 학부인데. 그럼 학과 이름이라도 바꿔 줄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러진 않을 거래요. 그냥 디지털미디어학과 문예창작전공이라는 이름으로 남는다나요.”

전혀 관련 없는 학과랑 합치고, 심지어 어느 학과의 무슨 전공으로 바뀐다니. 거의 흡수에 가까운 처사였다. 말이 문예창작전공이지, 그런 식으로 합쳤다가 문예창작과로 입학한 마지막 졸업생들이 다 졸업하면 문예창작과의 씨를 아예 말려버릴 심산인거다.

“올해, 그러니까 한 달 전에 입학한 신입생들은 어떻게 되는 거죠?”

“만약 정말 통폐합이 된다면……. 그 친구들은 앞으로 남은 사년을 낯선 학과에서 후배 없는 대학생활을 하게 되겠죠. 이 구조조정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게 신입생들이에요. 갓 학교에 들어와서 한창 적응해야할 시기인데 수업대신 피켓을 들다니 얼마나 불쌍해요? 이런 식의 구조조정이 있을 거면 신입생 모집 전에 하던가. 모집 후 폐과통보라니 학생을 소비자로 보는 것도 아니고……”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분노가 치밀어있었다. 어떻게 보면 교수보다 더 가혹한 위치에 있을 지도 모르는 게, 이 난리도가니 속에서 정신 차리고 학생들을 이끌어야할 학회장이었다. 다른 이들처럼 학과 존폐에 정신이 쇄약해질 법도 하지만 약해져선 안 되는 위치에 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부담이 커보였다.

 

다음에 향한 곳은 작년에 구조조정이 다 끝나, 폐과처리가 결정 난 어느 전문대학교의 연극영화과였다. 이들은 2년제다보니, 올해까지만 연극영화과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다가 남은 인원들이 졸업하면 그냥 학과가 사라지게 된다고 한다. 물론 14학번 신입생은 뽑지도 않았다. 올해까지 교과목을 이수해야 연극영화과로서 졸업이 가능하고, 그 이후를 넘기면 자동으로 다른 학과로 편입되게 된다고 한다. 폐과통보를 받기 전에 군대를 간 휴학생들이 그 대상이었다. 편입할 수 있는 학과는 본 대학 내에 있는 아무 학과나 선택하란다. 기계공학과, 컴퓨터학과, 간호과 등…… 정말 연극영화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곳은 없었다.

그래도 올해까지는 수업이 굴러갔다. 학회장에게 앙해를 구하고 교실로 들어가니 오십 명도 충분히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 강의실에 스무 명도 채 안 되는 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그나마 있는 학생들도 다들 휴대폰을 보거나 졸기 바빴다.

“신입생들 거의 삼분의 일이 자퇴했어요. 남은 학생들도 나름 다닌다고 다니곤 있지만 나오는 둥 마는 둥 하는 학생들도 많고요. 특히 남학생들은 군휴학도 미루면서 다니고 있죠. 아무래도 2년 내내 다니다 졸업하지 않으면 다른 학과로 튕겨나가니까요.”

다들 무기력해보였다. 쉬는 시간이 되어도 서로 이야기하기보단 각자의 휴대폰만 보고 있다. 작년 학기 초에 있었던 시위로 인해 서로 친해질 기회가 없었던 걸까? 아니면 어차피 사라질 학과, 서로 친해져야할 필요를 못 느끼는 걸까? 나는 학회장 인터뷰를 포함, 학생들의 모습 하나하나 영상에 담았다.

 

몇 달 간 편집을 거쳐 한 시간이 좀 안 되는 영상을 최종 완성했다. 곧 있을 저명한 국내영화제에 <벙어리는 스무 살>이라는 제목으로 출품했고, 지원 선배에게도 메일로 영화 완성 파일을 보냈다.

며칠 뒤에 영화제 관계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귀하의 영화는 수작이라고. <벙어리는 스무 살>이 최종검토작에 들어갔고 이제 회의만 남았다 한다. 상영 일만 기다리라는 관계자의 말에 들뜬 마음으로 영화제 날만 기다렸다. 드디어 긴 무명생활 끝에 내 이름을 한 영화가 많은 사람들 앞에 상영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제 시작 채 한 달도 안 남은 이 시점에 걸려온 이 전화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란 말인가.

“저희 측에서도 귀하의 노고가 담긴 영화를 꼭 개봉하고 싶었으나 최종회의 결과, 상영 불가 판정을 받았습니다.”

“아니…… 그러니까 그걸 왜 지금 말씀해주시는 거죠? 관계자 분께선 상영 일만 기다리라고 하셨단 말입니다. 영화제 한 달도 안 남았는데 최종검토작에 든 제 영화가 갑자기 상영불가라니 무슨 이유입니까?”

전화를 쥔 손이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얼굴엔 열이 달아오르고 누가 누르는 것 마냥 머리가 조여왔다. 혹시 이건 꿈인가? 수화기 너머는 잠시 동안 말이 없더니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다시 무뚝뚝한 톤으로 말했다.

“이유는 실력미달입니다. 보통 다큐 영화는 기자 같은 분들이 직접 발로 뛰며 기자 자격으로 들어갈 수 없는 깊숙한 곳까지 다 찍어내 사람들이 모르는 면면을 보여주는데, 귀하께서 만드신 작품은 다큐멘터리치곤 너무 얕다는 평가와 타 출품작에 비해 작품성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왜지? 거의 상영이 확정될 것처럼 굴다가 왜 한 달도 안 남은 이 시점에 개봉 불가라는 말이 나오는 거지? 내가 영화과 출신이 아니라서? 서울예대, 한예종이 아니라서? 아니면 혹시 정말…… 내 실력이 부족해서?

그 후론 계속 똑같은 말싸움만 반복했다. 십여 분 째 대화해도 결론이 안 나자, 우리 쪽은 더 할 얘기가 없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들고 있던 휴대폰을 아스팔트 바닥으로 던졌다. 휴대폰을 밟으며 나도 무슨 소리인지 모를 욕이 섞인 비명을 지르자 고시원 주인이 창문을 열고 윽박질렀다. 조용히 좀 하란다. 젠장, 젠장!

 

 

 

꽤 잘 만들었다. 오성이 만든 영화마다 매번 봐왔지만 다큐는 처음이라 염려가 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건 웬만한 다큐 못지않게 깊이가 있었다. 소설도 쓰고 영화도 만들던 녀석이라 그런지 다큐 속에 스토리텔링이 아주 잘 되어 있었다. 투자한 200만원이 아깝지 않은 작품이다.

문제는 며칠째 오성이 연락이 안 된다는 거다. 신난 목소리로 자기 영화가 최종검토에 들어갔다고 전화한 게 엊그제 같은데 전화 해봐도 없는 번호라고 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의 고시원에도 가봤다. 오성의 방을 노크했지만 돌아오는 소리가 없다. 문을 열어보니 방엔 아무도 없었다. 고시원 주인에게 오성의 행방을 물어봤다. 지난달에 나갔다고 한다. 어디로 갔는지 아냐고 물어보니 모른댄다.

시기는 이미 영화제 일주일도 채 안 남은 시간. 이런 때에 잠수를 탄다는 건 결국 상영에 실패했다는 거겠지. 오성은 왜 그렇게 연락도 없이 도망쳤어야 했을까. 영화 실패의 상처가 큰 걸까? 아니면 돈 때문에 그러나? 날 볼 면목이 없기라도 해서 이런 식으로 사라진 건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데.

그렇게 오성은 하루아침에 원래 세상에 없었던 사람처럼 사라졌다. 우리 문예창작과가 끝내 폐과되어버렸다는 건 두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지금, 오성이 내 앞에 서있다. 정육 앞치마를 입고서. 무려 삼년 만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갑다는 느낌보단 잃어버렸던 무언가를 끝내 찾았다는 기쁨이 더 강했다. 그런 나에 비해 오성은 입은 웃고 있었으나 눈동자는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하며 왼쪽 오른쪽 굴리고 있었다. 대강 인사를 나누고 이제 마감 다 끝나면 퇴근인데 밖에서 술이나 한잔 하자고 했으나.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너무 피곤해서…….”

그한테서 한 번도 들어 본적 없었던 완곡한 경어였다. 평소에 하던 가벼운 존댓말이 무색하게 그는 마치 나를 처음 만난 사람마냥 대했다. 난처한 마음이 새어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정말 반가웠지만 그 또한 세상을 피해 숨어야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터. 알겠다고, 다음에 꼭 한번 만나 마시자며 말하고 나는 자리를 떴다. 야채코너에서 상추와 깻잎을 고르고 있던 내 뒤로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선배 오늘은 밖에선 됐고 저희 집으로 가시죠. 요 앞입니다.”

그대로 마트 앞에서 폐장시간까지 기다렸다. 아내에게 차마 전화는 못하고 톡으로 방금 우연히 삼년 동안 소식이 없던 후배를 만났다고, 미안하지만 오늘은 늦게 들어갈 것 같다고 보냈다. 답장이 없다. 벌써 곯아떨어진 건지 화가 난건지.

이윽고 퇴근한 오성을 따라 그의 집으로 향했다. 그 옛날 고시원과 비교도 안 되게 좋은, 거실에 방 하나, 부엌이 딸린 적당한 크기의 원룸이었다. 그는 들고 있던 검은 봉지에서 딸기를 꺼냈다.

“방금 전에 과일코너에서 얻어온 마감 딸기입니다. 마트 일 하다 보니 고기, 과일 같은 거 싸게 사는데 도가 텄어요.”

너털웃음 짓는 그를 보며 나도 애써 웃었다. 딸기를 씻어온 그는 아까보단 덜 완곡한 경어로 그동안 미안했다고, 이렇게라도 만나서 반갑다고 한다.

우리는 자정이 다 되도록 지난 삼 년 간 못했던 안부를 묻고 온갖 이야기를 했다. 허나 오성에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냐고는 묻지 않았다.

“……저, 영화는 그만뒀습니다. 그 동안 안 해본 일이 없었어요. 안성에서 과일 유통하는 일도 해보고 과천 경마장에서 말 관리도 하고……. 근데 역시 자리 잡고 일하는 게 제일 낫더라고요.”

내 마음을 읽은 듯, 그는 내가 궁금해 하던 것들을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캐묻는 것 자체가 그를 괴롭히는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래도 다큐 영화 계속 찍어보려고 이 사람 저 사람 찾아가며 투자 받으려고 했었죠. 근데 진짜 아무도 투자 안 해주더라고요. 영화소재 듣자마자 질색하는 사람도 있더라니까요? 히트작도 없고 나이 먹도록 마땅한 인맥도 없고…… 이런 사람한테 누가 미쳤다고 투자해주겠어요?”

그는 얼굴을 내리 깔았다. 그건 마치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자신을 숨기는 작은 초식동물의 그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스스로 돈 모아 찍으려고 일하러 직접 뛰었죠. 근데 참 이상해요. 오백만원만 모으고 영화찍자, 천만 원만 모으고 영화 찍자, 하던 게 시간이 지나니까 원래 없었던 꿈이었다는 마냥 사라지더라니까요?”

나도 그러했다. 막 출판사에 들어갔을 때가 떠올랐다. 직업과 창작,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사람이 되고 싶었으나 통장 잔고가 늘어갈수록 창작 열의는 식어갔다. 얼마까지만 모으자는 결심을 반복하는 사이 창작욕이 알게 모르게 내 속에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는지 차마 눈치 챌 수 없었다. 돈이란 건 우스운 법이다. 좀 모인다 싶으면 집값이다 밥값, 통신비…… 눈코 뜰 새 없이 빠져나가는데, 그 빠져 나가는 것들 사이에 내 오랜 순수함도 새어나가고 있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하긴, 여자친구한테 빌붙어서 영화 찍던 놈이 뭔 경제관념이 있어야 말이죠. 영화 시나리오 떠오를 틈도 없이 바쁘게 살다보니 감도 잃었고요. 뭐, 그래도 나름 벌어서 사람답게 사니까 좋네요.”

말 그대로 그는 영화를 찍는 허오성이 아닌,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인간 허오성으로 돌아온 것이다. 주변을 둘러봤다. 40인치는 되어 보이는 TV, 그리 나쁘지 않은 소재의 소파와 온갖 가전기구들. 아주 부자는 아니어도 예전의 그 가난뱅이 허오성은 아니란 걸 알 수 있다. 목구멍에서 계속 간질이고 있던 말이 기어코 나오고 말았다.

“그럼 영화 다시 찍어 보는 게 어때? 직업이 아니라 요즘 취미로도 영화 찍는 사람들 많잖냐.”

내리 고개를 숙이고 말하던 오성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해요.”

마감 때 사온 거라 그런 건가, 딸기 맛이 참 시었다.

 

‘어떻게 해요.’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그 다섯 글자가 계속 귓속에 맴돌았다. ‘졸업 후 딱 십년 동안은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며 살겠다.’라는 말버릇으로 유명한 오성에게서 들은 믿기지 않는 한 마디였다. 머릿속에서 그의 말이 메아리마냥 울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시간이 오래 지나 영화를 어떻게 찍는 방법을 모른다는 의미의 ‘어떻게 해요’인지, 혹은 이젠 영화를 찍을 수 없는 나 자신이 되어버린 것에 대한 ‘어떻게 해요’인지 말이다.

 

집에 들어가니 온 방 불이 꺼져있었다. 오직 거실 TV만이 켜져 있다. 아내는 소파에 누워 뉴스채널을 켜둔 채로 잠들어 있었다. 뉴스채널에선 오늘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뉴스가 새벽시간까지도 계속 나오고 있었다.

어쩌면 오성의 영화가 상영불가 판정을 받은 건, 그의 실력미달이 이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쾅, 쾅, 쾅, 뉴스 속 한 여성 판사가 망치를 세 번 두드렸다. 문예창작과의, 허오성의, 이 시대의.

 

 

글 | 김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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