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난다, 2018.
허수경,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난다, 2018.

사전적으로 작가는 “문학 작품, 사진, 그림, 조각 등 예술품을 만드는 사람”이다. 문학 작품을 한정시켜서 말하자면, 시인은 시를 쓰는 사람이고, 소설가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고, 수필가는 수필을 쓰는 사람이고, 평론가는 평론을 쓰는 사람이다.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 많이 읽고, 많이 쓰고, 많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요즈음에는 거기에 많이 말해야 한다는 조건이 추가되기도 한다. 작가가 뭐 하는 사람인지, 다시 말하면 ‘무엇을 쓰는 사람인지’(what),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how)에 대해서는 말도 많고 글도 많다. 그런데 정작 ‘왜 쓰는지’(why)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을 찾기 어렵다. 혹시나 해서 ‘왜 쓰는지’라는 키 워드로 검색해 보니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2010)와 한창훈의 <한창훈의 나는 왜 쓰는가>(2015)가 있다. 전자는 오웰의 에세이고, 후자는 작가 자신의 문학적 자서전이다. 그런데 두 권 모두 책 제목과는 달리 ‘글을 왜 쓰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이유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글을 쓰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있다. 예컨대 정치인은 대체로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글을 쓴다. 대표적으로 그들의 자서전을 예로 들 수 있다. 직접 썼을 수도 있고, 구술한 내용을 누군가 받아 적었을 수도 있다. 누가 썼든 간에 자서전의 주인은 글 속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자서전은 ‘나는 이런 사람이니 나를 알아 달라’고 외치는 메아리와도 같다. 자서전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수기라는 게 있다. 수기는 실제 삶을 글감으로 썼다는 점에서는 자서전과 같지만, 목적만 놓고 보면 자서전과는 조금 다르다. 즉 자서전이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인정욕구’에서 비롯되었다면, 수기는 자신의 상황과 처지를 알리려는 절박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다르다. 그러나 글의 목적에서 ‘저자 중심에서 쓴 글’이라는 점에서 볼 때 자서전이나 수기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글을 쓰는 또 다른 목적도 있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영화 <위대한 개츠비>(2013)에서 주인공 닉(토비 맥과이어 분)은 몸과 마음이 피폐한 상태에서 정신과 의사의 치료를 받는다. 의사는 닉의 몸의 병보다는 마음의 병에 주목해 그에게 마음을 짓누르는 원인을 글로 써보라고 조언한다. 실제로 글쓰기는 병원의 신경정신과 치료와 심리학 치료에서 치료 방법으로 많이 사용된다고 한다. 아무튼 닉은 의사의 조언을 받아들여 그를 짓누르는 원인을 글로 써내려 가는데, 그 글이 바로 ‘개츠비의 삶과 죽음의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화자 닉보다는 당연히 개츠비(레너드 디캐프리오)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만약 닉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자면, 영화는 닉의 치유담 또는 그의 성장소설로도 읽힐 수 있다. 즉 닉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추스르기 위해서 글을 썼고, 글쓰기를 통해 위로를 받고 치유된다. 더 나아가 그는 개츠비의 삶을 이해하고, 진정으로 개츠비가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어찌 보면 개츠비는 닉에 의해 ‘위대한 개츠비’로 탈바꿈 혹은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런데 닉의 치유의 글쓰기도 엄밀하기 말하면 자서전이나 수기와 마찬가지로 ‘저자 중심에서 쓴 글’이기 때문에 맥락은 조금 다르지만 같은 계열의 글쓰기로 묶인다.

  그런데 이와 정반대로 이타적인 글쓰기, 즉 독자 중심의 글쓰기가 있다. 이타적인 글쓰기의 경우, 저자가 글을 쓰는 이유는 자신의 인정 욕구를 채우거나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토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이타적인 글쓰기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글쓰기다. 대표적인 예로 작가 허수경을 들 수 있다. 그녀는 자전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아틀란티스야, 잘 가>(2011)의 작가 소개에서, “앞으로의 소망이 있다면 젊은 시인들과 젊은 노점상들과 젊은 노동자들에게 아부하는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고백하자면 예전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 이 문장을 놓쳤는데, 다시 읽으니 가슴에 그대로 박힌다. 이 문장에서 누군가는 ‘젊은’에 방점을 둘 수도 있고, 누군가는 ‘아부’에 방점을 둘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노점상들’과 ‘노동자들’에 눈길이 머물고, 작가의 약자에 대한 연민 또는 연대를 한참 생각하게 된다.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한 작가의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를 읽으면서는 더욱 그랬다. 참고로 이 책은 <길모퉁이의 중국식당>(2003)의 개정판인데, 책을 출간한 후 얼마 안 되어 작가는 안타깝게도 유명을 달리했다. 아무튼 작가 허수경처럼 누군가는 이타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혹은 이기적인 마음을 경계하기 위해서 글을 쓴다. 그녀의 이타적인 글쓰기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소설 <아틀란티스야, 잘 가>는 ‘미미’, 실제 이름은 경실의 일기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발신자 경실이 수신자 일기장에게 보내는 편지다. 경실은 뚱뚱하고 못생겼고 친구가 별로 없다. 가족조차 그녀를 외면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청 건설 부국장으로 재개발 사업과 관련해 사람들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기는 부패 공무원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경실에게는 관심도 없고, 온종일 계 모임 등을 한다는 핑계로 밤늦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들은 뚱뚱한 경실을 창피하게 생각하고, 그렇기 때문에 경실은 외롭기만 하다. 그녀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찐빵에 집착하고, 미미라는 이름으로 일기장에게 편지를 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이복언니라 하며 갑자기 쳐들어온 ‘정우’와 함께 ‘아틀란티스’라는 잃어버린 낙원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를 글을 쓴다. <아틀란티스야, 잘가>는 재개발 붐이 불던 1970년대와 198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지만 작가는 시대를 차갑게 비판하거나 그렇다고 따뜻하게 그리워하지 않는다. 그냥 그 시기를 지나가는 하나의 시간으로만 여길 뿐이다. 대신 그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속의 ‘사람들’에 시선을 두고 있다.

  작가 허수경은 <아틀란티스야, 잘 가>의 경실처럼 어렸을 때 실제로 ‘뚱뚱했’고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고 말한다. 사실 작가뿐만 아니라 말은 안 해도 누구에게나 콤플렉스가 있다. 콤플렉스의 원인은 돈, 성격, 외모, 지역, 공부, 가족 등 다종다양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콤플렉스는 점점 짙어지기도 하고 점점 엷어지기도 한다. 대개의 콤플렉스는 엷어지기에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콤플렉스를 극복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사람들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게 아니라 콤플렉스에 무뎌지는 것이다. 그런데 작가의 경우 외모 콤플렉스는 항상 그녀와 함께했던 것 같다. 작가의 콤플렉스는 <아틀란티스야, 잘가>의 경실뿐만 아니라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서도 그림자처럼 나타난다. 때때로 콤플렉스는 열등감과 자기 비하를 넘어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혐오, 사회와 세상에 대한 환멸 등 왜곡되고 그릇된 형태로 발산한다. 그런데 작가 허수경의 경우에는 정반대로 콤플렉스가 자신에 대한 성찰과 타인에 대한 지극한 관심과 배려로 향한다.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에서 작가 허수경이 관심을 두는 대상은 사람을 포함해서 주로 ‘사소한 것들’, ‘쉽게 잊히는 것들’, 혹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 못하는 것들’이다. 예컨대 그녀는 그림 형제의 잔혹 동화에서 전쟁터에서 어슬렁거리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떠올린다. 막걸리 속의 꽃잎에서 감옥에 가거나 노동조합을 만드는 일을 하러 간 동료들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 ‘늙은 학생’이 되어버려 “단 한 번도 자기 외에는 남을 책임져보지 않은” 자신을 자책한다. 이처럼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는 늘 타인에 대한 미안함과 자기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늘 자리하고 있다. 그냥 눈 감으면 아무도 모를 텐데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고 있는데도, 작가는 그렇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작가는 차를 마시면서도 물에 난 상처를 염려하고 걱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찻물을 받고, 끓이고, 식힐 때 물의 상처를 달래주기 위해 천천히 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상처를 달랜 물을 마시는 게 물에 가장 큰 상처를 주기에, 자신을 “시커먼 내 속”이라고 말하며 괴로워한다. 작가의 찻물에 대한 미안함은 궁극적으로 타인에 대한 미안함으로까지 확장된다.
  늦은 나이에 낯선 땅 독일에서 고대 근동 고고학이라는 이름도 어려운 학문을 공부하는 ‘늙은 학생’의 작가는 도서관과 기숙사 근처에서 마주치는 동식물에게서도 따뜻한 시선을 잃지 않는다. 사냥을 나온 배고픈 올빼미를 불쌍하게 생각하면서도 동시에 쥐들이 올빼미들에게 잡히지 않기를 바란다. 기숙사 아래로 찾아와 당근이나 오이를 주면 잘 먹던 토끼가 차에 치였을 때는 누구보다도 마음 아파한다. 욕심으로 토끼에게 달아 준 파란 리본 때문에 토끼가 그렇게 된 게 아닌가, 자책한다. 홍수가 나 물속에서 땅 길을 찾지 못해 죽은 하마를 가엽게 여긴다.

  여담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인권도 이 지경인데 언감생심 동물권이라니”라며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동물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동물을 좋아하고 좋아하지 않고를 떠나, 동물이 사람보다 더 소중해서가 아니라, 동물조차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인간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동물을 통해 생명의 소중함, 더 나아가 환경의 소중함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 동물권 운동의 본령이다. 작가가 동물들에 보내는 따뜻한 시선은 동물들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에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다.

  작가 허수경은 오랜 기간 독일에 머물면서 고고학을 공부하고 틈틈이 시와 소설, 그리고 산문을 써 왔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주로 자신이 독일에서 보고 듣고 독일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들이 독일이라는 한 특정 국가의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예컨대 이슬람교로 개종한 여선생이 머릿수건 때문에 학부모들로부터 고소를 당했고, 법원은 종교의 중립성을 내세워 그 여선생에게 머릿수건을 벗으라는 판결을 내렸다는 TV 뉴스가 <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의 한 꼭지를 차지한다. 그런데 작가는 그 뉴스에 학교 교실 칠판 위에는 십자가가 걸려있다는 설명을 포개 놓는다. 미국이 아니라 독일에서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고 있다. 예전의 일이지만 아마 지금도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된다. 작가는 중립이란 말이 실제로 존재하는지, 그리고 실제로 가능한지 질문한다. 그녀의 질문은 궁극적으로는 나와 우리 주변을 둘러보게 하고, 더 나아가 중립이 정말 중립적인지 생각해 보게 한다. 차별을 금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의 차별을 허용하면 종래에는 모든 차별을 인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작가는 “뚱뚱하고 우울한 소녀”에다가,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문학의 시작이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그녀는 열등감이나 자기 비하와 같은 부정적인 콤플렉스로 향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사회와 세상을 바라보는 올바른 태도 등 긍정적인 가치관으로 향했다. 그녀의 가치관과 태도는 더 나아가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태도에까지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이제 그녀의 귀한 글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게 무엇보다도 가장 안타깝다. 많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윤정용 본교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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