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뷰티 매니저, 콜센터 직원, 간호조무사의 분장을 한 배우들이 한쪽 팔, 한 다리를 위태롭게 들고 230초간 신체 균형을 잡는다. 앙다문 입 그리고 부들부들 떨리는 가위를 든 손. 표정 없는 얼굴 속 극도의 불안함. 하나의 긴 테이크로 구성된 장면들은 소리와 함께 끝나고, 관객은 신체와 감정을 구속하는 불편한 시간을 경험한다. 현대사회의 감정노동에 따른 인간소외 문제를 꼬집은 2015년 서울국제실험 영화제 참가작 <감정의 시대: 서비스 노동의 관계미학>이다.

 

  “공간 또는 상황적 배경 자체의 규모가 작거나, 흥행을 끌 만한 소재가 아닌 걸 독립영화라고 하지요. 그렇지만 독립영화 감독들도 흥행이 되길 바라요. 개봉하면 누구나 자기 작품을 관객들이 많이 보길 원하죠.” 30여 년간 다수의 독립영화를 만들어온 이정국 감독이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올해 100주년을 맞이한 한국영화계의 최대 화두는 예술과 문화의 핵심으로 등장한 다양성이다. 한국영화가 꾸준히 성장하기 위해서는 폭넓은 주제와 형식의 영화들이 생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계 5번째로 2억 관객을 돌파했다는 명성에 맞지 않게 한국영화는 다양성 추구에 있어 실로 부진하다.

 

 

독립·예술영화, ‘다양성의 해답 될까

  영화계에서는 한국영화에 다양성을 불어넣어 줄 해답으로 독립·예술영화를 지목한다. 영화진흥위원회에 따르면 독립·예술영화는 순제작비 10억 원 미만인 60분 이상의 영화작품성과 예술성을 지향하는 영화를 일컫는다. 다시 말해, 거대자본에서 독립해 창작의 자유도가 높고 작가의 목소리가 많이 반영되는 영화다.

  독립·예술영화에서는 흥행의 위험부담이 큰 상업영화에 비해 소재나 표현상에서 감독의 실험과 도전이 자유롭게 나타난다. 양익준 감독은 집 전세금을 빼면서 힘겹게 <똥파리>를 만들었고, 그의 거침과 투박함은 영화에 생생히 담겨 호응을 얻었다. 가정폭력을 겪은 깡패 상훈과 여고생 연희가 동질감을 느끼고 가까워진다는 소재는 폭력의 굴레를 잘 드러냈다.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은 열한 살 소녀의 우정과 갈등을 담담한 어조로 다뤘다. 소녀의 고민을 담아내며 어른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는 한편, 2등이라는 성적에 울고 서로 시기하는 아이들의 어두운 모습을 담아 어른들의 반성을 끌어냈다.

  기존의 영화 관습에서 벗어나 소재와 표현이 자유로운 독립영화의 성장은 결국 상업영화의 다양성 증진에 기여해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된다. 차민철(동의대 영화학과) 교수는 독립·예술영화는 인간과 삶에 관해 미시적인 주제의식을 담아내고 도전적인 형식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잠재력을 지닌다이들이 풍부하게 생산될 때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영화 생태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산업, 나아가 우리 사회와 문화의 다양성을 키우는 데도 자극제가 될 것이라 전망했다.

  하지만 한국영화계에서 독립·예술영화 산업은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는 실정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18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 발표에 따르면 2018년 한 해 동안 한국 독립·예술영화를 본 관객은 전체 관객의 0.5%에 불과했다. 20142.61%였던 관객 점유율은 2015년에 1.13%, 2017년에는 0.96%로 급감했다. 2018년에 개봉한 독립·예술영화는 총 498편으로 작품 수는 2017(499)과 유사했지만, 상영작의 관객 수는 전년 대비 12.3%가 감소했다.

 

유통·배급 안정성과 통로 다양화 필요

  독립·예술영화의 주된 어려움은 배급과 홍보 과정에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분석이다. ‘스크린 독과점은 현재 독립영화가 설 자리를 잃게 된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투자·배급·상영사업을 수직 계열화한 소수 대기업이 사내에서 투자·배급한 소수의 영화를 많은 스크린에 배당하면서 독립영화의 스크린이 줄어드는 것이다. 실제로 공정거래위원회는 2017년 시장구조조사에서 영화관 운영업을 독과점구조 산업으로 분류했다. 정성욱(동의대 영화학과) 교수는 시장경제에서 이익을 목적으로 자유 경쟁을 하는 기업이 자율적으로 영화 문화를 개선하긴 어려울 것이라며 정책적으로 독과점을 방지하거나 멀티플렉스 내에 전용 상영관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에 독립·예술영화 배급센터를 운영해 배급과정을 지원하는 방안이 제시되고 있다. 10월 문화체육관광부는 내년 독립·예술영화 유통지원센터’(가칭)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알렸다. 배급센터를 통해 전국의 미디어센터나 공공문화회관, 민간 독립영화관 등에 독립영화를 안정적으로 배급하는 네트워크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송낙원(건국대 영상영화학과) 교수는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독립영화 배급사들을 묶어 배급을 위한 네트워크와 프로그래밍을 위탁하면서,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비용을 지원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전했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스트리밍서비스, OTT(Over The Top), VOD 시장의 확대가 독립·예술영화의 새로운 유통 통로가 될 것이라는 긍정적인 전망도 있다. 한국독립영화협회가 운영하고 네이버가 지원하는 네이버 인디극장이 대표적인 예다. 2014년부터 독립영화 활성화와 다양성 문화 저변 확대를 목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해당 서비스는, 일반 대중에게 친숙한 스트리밍서비스인 네이버 TV로 독립영화를 상영하고 감독과 작품을 소개한다. 정성욱 교수는 모바일시대 유통망을 적극 활용해 유통 통로를 넓히고 수익을 창출한다면, 제작자들이 창작을 계속 이어가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관객에게 한 발짝 가까이

  홍보 부족과 이로 인한 젊은 관객층의 무관심도 독립·예술영화 부진의 원인으로 꼽힌다. 특히 과거 독립영화의 주 소비층이던 젊은층이 등을 돌린 것은 뼈아프다. 소자본으로 제작되는 독립영화는 제작비뿐 아니라 마케팅비도 적기 때문에 홍보력이 낮다. 강세라(국민대 시각디자인학과18) 씨는 버스나 온라인 포털을 통해 활발히 홍보되는 일반영화와 달리, 독립·예술영화는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조차도 모른다비긴어게인, 위플래쉬처럼 입소문이 난 외국 독립영화는 자주 보는 편이라고 말했다. CJ엔터테인먼트 국내사업 대표 길종철(한양대 연극영화과) 특임교수는 독립영화의 주 관람객이던 과거세대 청년층에 비해, 현재 젊은층은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 온라인을 통해 영화를 주로 보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독립·예술영화 전용 극장이나 영화제를 찾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에 독립영화를 관객에게 적극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영화제는 해마다 제작되는 좋은 작품과 숨겨진 감독을 발굴해 독립영화가 관객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계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다가오는 1128일부터 126일까지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를 포함해, 국내에서는 서울인권영화제, 노인영화제, 여성영화제가 열려 대중에게 생소한 다양성 독립영화를 매년 소개하고 있다. 양한아(전북대 수의예과19) 씨는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해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관람했다일과 사랑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과정이 섬세하게 그려져, 일반 상업영화에서 느끼기 어려웠던 감독의 따뜻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전했다.

  독립영화는 그동안 영화의 예술적 원천으로 기능했다. 산업의 흐름과 관계없이 개성적인 영화가 계속 생산되는 것은 영화가 예술로 지속될 수 있는 존재 이유다. 김윤지(한양대 연극영화과) 교수는 “90년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인력, 소재, 논조 등은 80년대 후반 활발히 제작됐던 한국의 독립영화들로부터 기인했다독립영화가 무너지면 2020년대 한국영화를 뒤받칠 힘이 사라질 것이라 전했다. 이어 김 교수는 현재의 독립영화 시장에도 관객들을 사로잡을 수 있는 영화와 좋은 작품성을 이끌어낼 능력은 이미 존재한다배급과 홍보를 활성화할 주변 환경만 갖춰진다면 우리의 독립영화는 충분히 자생할 힘이 있다고 강조했다.

 

최현슬 기자 puri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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