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학번 김왈영 교우 총격으로 숨져

성명 오기(誤記)로 존재조차 몰라

이미 4·19묘지에, “뒤늦은 발견”

  4·19혁명 중 고려대생 사망자가 없었다는 건 지난 60년간 사실이었다. 본교가 2012년 펴낸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에도 고대생 사망자가 전무(全無)’했다고 기록돼있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은 올해, 혁명 당시 고대생 사망자의 존재가 확인됐다. 서명일 본교 박물관(관장=강제훈 교수) 기록자료실 과장이 발견한 고대생 4·19혁명 희생자의 이름은 김왈영(金曰寧)’이다(이때 편안할 녕자다. ‘김왈녕김왈영, 묘비에 기재된 대로 김왈영이라 표기했다). 60년 만에 새로운 역사로 기록한다.

 

경무대 시위 중 총상 입고 사망

  유일한 고대생 4·19혁명 희생자로 확인된 김왈영 교우는 서울 출신으로 193573일생이다. 서울 중앙고등학교를 졸업해 195441일 본교 문리대 화학과에 입학했다. <4·19의 민중사> ‘4월 혁명 희생자 약전은 김 교우가 키가 커서 배구를 특히 잘했으며 매우 민첩하고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기록했다. 사망 당시 김 교우는 이미 결혼한 상태였다고 4·19혁명희생자유족회와 중앙교우회는 전했다.

  김왈영 교우의 묘비와 공적 조서에 의하면, 그는 1960419일 있었던 경무대(오늘날 청와대) 앞 시위에 참여했다. 3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자행된 부정과 불법을 규탄하는 시위였다. 3만 명의 대학생과 고등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경무대로 몰려들었고, 당시 데모를 진압하던 경찰은 군중을 향해 발포했다. 시민들을 향한 무차별 사격이었다. 이날 경무대 앞 경찰 총격으로 인한 사망자는 21, 부상자는 172명이었다.

  김왈영 교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는 데모 학생들이 탄 차를 몰고 경무대 입구 바리케이드를 뚫다 목에 총상을 입었다. 이후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오후 5시경 사망했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를 비롯한 언론은 호외를 발행해 사망 소식을 전했다. 1960421일 자 동아일보 호외에 따르면, 419일 서울 전역에 있었던 데모로 인해 민간인 94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사망자 명단에 김왈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대신 고대 문리대 소속의 김일녕이 있었다. 보도과정에서 김왈영()’()’로 착각하고 김일녕이라 오기한 탓이다. 김왈영 교우를 발견한 서명일 과장은 당시 정부가 발표한 사망자 명단이 한자로 표기돼 기자들이 한글로 옮겨 적는 과정에서 실수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후 1962년에 받은 4·19혁명 공로 건국포장 역시 김왈영이 아닌 김일녕의 이름으로 수여됐다.

국립 419민주묘지에 안장된 故김왈영 교우의 묘비명 | 양태은 기자 aurore@

 

홀로 나온 시위, 의로운 죽음

  비록 오기였지만 언론 보도에도 존재가 묻힌 건 당시 재학생 중 그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1960년 당시 김 교우는 전역 후 복학을 준비하던 상태였다. 4·18의거 참가자들이 주로 57~60학번 학생들로 구성됐던 점을 고려할 때, 54학번으로 56년 입대해 학교와 멀어져 있던 김 교우를 당시 재학생들이 몰랐을 개연성이 높다. 4·19민주혁명회 소속인 김재우(상학과 60학번) 교우는 나를 포함해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들도 당시 사망자가 있다고는 듣지 못했다당시 김왈영이 재학생이 아니라서 그의 상황을 아는 동기나 선배가 없었던 것 같다고 얘기했다.

  김 교우가 본교 데모대와 별도로 시위에 참여했던 것도 당시 재학생들이 그를 몰랐던 이유다. <고려대학교 4.18의거 실록>에 따르면, 419일 당시 본교 데모대와 김왈영 교우의 동선은 일치하지 않았다. 본교 데모대는 김왈영 교우가 사망한 경무대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다.

  누군가 사망자 명단을 보고 본교에 김일녕이라는 학생이 있는지 문의해도, 그의 존재를 찾을 길은 없었다. 수기로 적힌 학적부엔 본래 이름인 김왈영이 한자로 기록돼있기 때문이다. 서명일 과장은 당시 신문에 오타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학교 이름을 잘못 쓴 것으로 생각하고 넘어갔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 결과, 1960419일로부터 60년간 고대생 4·19혁명 사망자 김왈영은 본교의 역사에서 빠져 있었다.

 

60년 지나 다시 발견된 이름

  김왈영 교우의 존재가 발견된 건 60년 만의 우연이었다. 본교 박물관에서 ‘4·18의거 60주년 특별전을 위해 전시 자료를 준비하던 중, 서명일 과장은 언론에 보도된 사망자 명단 속 고대문리대 김일녕을 찾았다. 처음엔 오보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려대에서 학업을 마치고 직원으로 근무하는 25년간 희생자가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고대생 중에는 4·19혁명 희생자가 없다는 기존 인식이 너무 강력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김일녕이라는 이름은 전산화된 본교 학적부 데이터베이스에는 있었다. 이는 수기로 작성한 학적부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담당자가 김왈영김일녕이라 적었기 때문이다. 60년 전 기자들과 같은 실수다. 이 실수 덕분에 박물관은 김일녕이 고대생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故김왈영 교우의 학적부 사진제공│본교 박물관

 

  본래 이름을 김왈영으로 확정지을 수 있었던 건 국립4·19민주묘지 안장자 기록 덕분이었다. ‘김일녕이라는 이름으로 전산화된 학적부의 생년월일과 사진을 안장자 기록과 비교하며 김일녕이 국립묘지의 김왈영과 동일 인물임을 확인했다. 서명일 과장은 국립묘지에 안장할 때 유족과 협의를 거치기 때문에 묘비 속 이름이 제일 정확하다고 설명했다.

  이후 <4·19의 민중사>‘4월 혁명 희생자 약전과 김 교우의 모교인 중앙고등학교가 펴낸 <중앙 100년사>에서 김왈영을 찾으면서, 언론에 보도된 고대생 4·19혁명 희생자가 김왈영 교우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서명일 과장은 지금에서야 발견한 것이 부끄럽지만 공개하는 게 당연한 도리라며 김왈영 선생의 존재를 고려대 스스로 밝혀내 그나마 다행이라고 감춰진 사실(史實)을 발견한 소감을 전했다.

 

| 조민호·조영윤기자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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