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해하다. 추상화를 마주한 일반인들은 대부분 이렇게 생각한다. 직관적이지 않은 추상화의 세계를 이해하려면 작가와 작품에 대한 이해가 동반돼야 해서다. 지적인 감상을 통해 시각적 정보를 넘어선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 한국 추상미술은 영혼, 무한, 자연 등을 표현하는 한국적 미의식과 동양철학에 기초한다. 한국 추상화의 흐름을 주도한 김환기, 박서보, 이우환은 각각 점화, 단색화, 미니멀리즘의 거장으로 손꼽힌다.

 

점으로 수놓은 김환기의 ‘우주’

김환기 ‘우주(Universe 5-IV-71 #200)’ 1971년작

  푸른 단색조의 화면이 공간을 압도한다. 대칭을 이룬 두 원의 이미지가 하나로 연결 돼 더욱 완벽한 우주를 만들어 낸다. 점 하나하나는 우주를 구성하는 별이자, 우주 그 자체로서 조화롭게 펼쳐져 있다. 갤러리현대 개관 50주년 특별전에서 마주한 김환기의 ‘우주’는 장엄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 추상미술은 1930년대 중후반 일본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했다.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환기도 한국 1세대 추상화가의 대표주자다. 서화 전통에 익숙한 1세대 작가들은 캔버스를 바닥에 두고 물감이 스며들게 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우주’를 비롯한 김환기의 후기 작품들에서도 바닥에 둔 캔버스에 마치 화선지에 먹을 스미듯 점을 하나씩 찍는 기법이 활용됐다.

  김환기가 뉴욕 생활 중에 그린 ‘우주’는 본질적 자연을 추구했던 그의 내면세계가 점의 집합으로 표현돼있다. 본질로 향하는 생략, 즉 진정한 의미의 추상이 반영된 것이다. 점 하나하나를 끝없이 반복해 찍는 과정이 작가를 무념무상의 정신 상태로 이끈다. 존재에 대한 자각이 사라진 무념무상의 경지에서 작위적이거나 과장된 형태는 사라지고, 자연의 본질에 이르게 된다. ‘우주’는 작년에 한국 미술 역사상 최고 낙찰가인 132억 원을 기록했다.

  김환기는 추상미술을 한국적인 방식으로 풀어가고자 했다. 서양의 재료와 양식에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자연관 등 한국 고유의 미적 정신을 결합해 독자적인 화풍을 구현했다. 그는 추상이 단순한 조형에서 그치지 않고 자연과 인생을 구체적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봤다. 안용준 예술학 박사는 “김환기는 자연의 모습이나 현실의 반영이라는 조형 의식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각에서 대상의 본질을 구성했다”고 말했다.

 

반복을 통해 초월 표현한 박서보의 ‘묘법'

박서보 ‘묘법 NO. 1-75’1975년작

  김환기가 추상으로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박서보는 1970년대 단색화를 통해 한국적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박서보는 1960년대부터 ‘묘법’ 연작을 발표하며 단색화를 발전시켜왔다. ‘묘법’의 특징 역시 반복에 있다. 밑칠한 캔버스 위로 선들이 반복된다. 끝인 듯 끝을 알 수 없는 흐름이 솟구친다. 그 위에 다시 물감을 칠하고, 또 반복해서 연필로 선을 긋는다.

  덧붙이고 지우는 행위의 무수한 반복 자체가 예술이 된다. 단색화에 드러난 반복은 정신적 초월을 상징한다. 무수한 반복은 일종의 수행으로서 행위가 거듭될수록 작가 는 정념을 가라앉힌다. 순수의 상태에 도달한 작가는 물질 이면의 본질을 직시할 수 있다. 작품을 완성하는 과정에서 이뤄지는 작가의 반복적 성찰이 작품에 정신성을 투영하고, 작품 전체적으로는 균질의 미가 담긴다. 그림의 과정과 결과 모두가 예술로 인정 받는 것이다.

  묘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질서정연해 보이는 선의 반복 속에도 세밀한 굴곡이 있다. 굴곡을 품은 평면의 모양새가 단조로움 속 재미를 더한다. 김달진미술연구소는 “박서보는 특유의 묘법으로 한국적 추상의 정체성을 마련한 작가로 미술사적 의의가 있다” 며 “기법의 독창성 및 대표성을 갖췄고 새로운 미술 담론을 주도했다”고 평가했다.

"그림은 치유의 도구가 되어야한다" - 박서보

"백색의 공간은 가능성으로 충만한 , 깊고 완벽한 적막이다" - 바실라 칸딘스키

 

 

절제된 반복성의 이우환 미니멀리즘

  단색화의 또 다른 거장인 이우환의 작품에서는 절제된 반복성이 엿보인다. 이우환은 미니멀아트를 받아들이고 이를 동양철학으로 해석해 한국 모노크롬회화(한 가지 계열의 색조로 그린 그림)의 발전을 이룩했다. 제한된 색과 재료로 구성된 그의 작품은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구현한다. 화면을 단조로이 구성하고 단색을 활용해 담백한 동양적 미를 표출하는 것이다.

  이우환의 화풍은 어릴 적 배웠던 서예에 기반을 둔다. 그는 서예를 하며 우주의 시작과 끝이 점에서 비롯된다는 사상을 싹틔웠다. 대표작인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연작에서는 질서와 균형이 잡힌 나열과 운율을 확인할 수 있다.

이우환 ‘선으로부터’ 1982년작

  '선으로부터는 선의 절제된 반복으로 구성된다. 캔버스 위에서 시작한 선이 거의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 있다.하단으로 갈수록 흐릿해지는 선은 시간의 흐름을 의미하고 되풀이 과정은 동양의 무한을 상징한다.

  나타남과 사라짐, 유에서 무로의 이동, 무한한 반복은 동양적 무한의 특징이다. 각각의 점 혹은 선은 리듬감 있게 배치되지만, 개별적으로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전체 속에서 조화를 이룰 때 가치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제된 정신에서 온 동양의 미니멀리즘은 산업 사회의 대량 생산 풍토에서 탄생한 서구의 미니멀리즘과 구분된다.

  최소한의 표현으로 이우환은 보이는 것을 초월한, 무한의 세계를 추구한다. 최소한의 있음()으로 광활한 없음()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다. ‘선으로부터의 반복된 선에서 시간과 공간의 공존 그리고 본질적 자연을 유추하는 식이다.

  추상화는 구체적인 형상을 제시하지 않기에 해석의 다양성도 극대화된다. 작가마다 사용하는 기법과 철학, 구현 내용이 달라 하나의 시각으로 작품을 이해하기도 어렵다. 19세기 초반 카메라가 발명되자, 작가들은 사진이 더 잘 해낼 수 있는 현실의 외적 모방을 꺼리기 시작했다. 감정과 정신의 비가시적인 내용을 작품에 담아내고자 한 것이다. 추상미술을 이해할 때 작품이 전하고자 하는 감성적 측면, 조형적 요소 간 조화, 균형 등 화면 내 자율적인 질서 모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안용준 박사는 “‘저 정도는 나도 그릴 수 있다고 말하는 쉬워 보이는 작품에도 작가가 추구한 초월의 세계가 담겨 있다추상화가들은 구상화를 마스터한 뒤 관념을 발전해 추상화에 이르렀으며, 나름의 신념을 가지고 작품에 영혼의 리듬을 그려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우환 ‘점으로부터’ 1980년작

 

 

 

글│신혜빈 기자 venus@

사진│배수빈 기자 sub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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