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쿠아리우스인지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떠오르지는 않는다. 찰스 맨슨이 물병자리일까, 해서 찾아봤지만 그것도 아니다. 그러면 그의 뒤를 쫓는 샘 호디악 형사가 물병자리일까 했지만 그런 이야기 역시 전혀 나오지 않는다. 굳이 얘기하자면 1969년에 핍스 디멘션(The 5th Demention)이 발표한 걸세출의 팝음악 <아쿠아리우스 / 렛 더 선샤인(Aquarius / Let the Sunshine>으로 유추해 봤을 때 물병자리는 별자리 12궁 중에 20세기에 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이 영화의 제목은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믿거나 말거나.

 

 

 이 드라마의 제목으로 포털에 치면 이렇게 내용 설명이 나온다. ‘LA 경찰 샘 호디악과 희대의 살인마 찰스 맨슨의 쫓고 쫓기는 추적 게임을 그리는 드라마.’ 근데 그건 순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거짓말이다. 찰리 맨슨을 뒤쫓는 이야기인 건 맞지만 그 이야기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이 드라마는 시대의 아우라가 더 중요해 보인다. 영화의 시간적 배경을 말하는 것인데 그것이야말로 이 이야기의 핵심 기둥 줄거리이자 테마이기 때문이다.

 <아쿠아리우스>1967년을 배경으로 한다. 앙샹 레짐(구 시대)의 반동이 가속화되고 있었던 시대였다. 1964년 소위 통킹만 사건으로 미군의 개입이 본격화된 베트남전은 점차 확대일로에 있었던 시대였다. 당연히 미국 국내에서는 반전(反戰) 시위가 서서히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1968! 미국은 바야흐로 공화당 리처드 닉슨을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선거 직전 유력한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된 후 이렇다 할 경쟁자가 없던 차였다. 또 다른 흑인 운동가 마틴 루터 킹 역시 암살당했던 때이다. 미국은 이때 피의 역사를 거치는 기간이었다. 1967년은 백인 중산층과 부르주아들, 흔히들 와스프(WASP : 화이트 앵글로 색슨 프로테스탄트)들이 기를 쓰고 진보를 저지하려고 애쓰던 시기였다. 닉슨이 역설적으로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기였다는 얘기다. 드라마 <아쿠아리우스>는 바로 그 지점을 통과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그리려고 한다.

 모든 사건이 찰스 맨슨 때문에 빚어진 것은 맞다. 오랜 공화당 지지자이자 닉슨 선거 캠프에서 자금 총괄 담당을 맡게 될 켄 칸은 미국 전역에서 내로라하는 변호사이다. 그런데 그는 남색(男色)의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고 찰스 맨슨은 칸과 그의 지인들(미 서부의 유력 정치인과 재계 인물들)에게 남창(男娼)과 콜걸들을 소개해 주며 관계를 맺어 왔다. 이들의 그룹 섹스는 너무 질퍽했던 터라 마약과 폭력이 오갔고 그 과정에서 살인사건도 벌어졌던 터였다. 하지만 과거사다. 드라마에는 그 이후부터가 나온다.

 맨슨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곧 이들 상류층의 파렴치한 뭔가를 대신했는지 아니면 연루됐는지 등등해서 감옥에 갔다 왔으며 석방된 후에는 이들의 고혈을 짜내는 중이다. 협박으로 돈을 갈취하고 자신의 계급적 상승을 꾀하려 애쓴다. 찰스 맨슨은 마약과 프리섹스 등으로 어리고 젊은 여자애들, 특히 칸의 16살 딸인 에마 등을 자신의 신도(信徒)로 끌어들인다. 그 딸을 찾는 과정에서 형사 샘 호디악은 곧 몰아닥칠 엄청난 비극의 피 냄새를 맡게 된다. 실제로 맨슨은 1969년에 유명 영화감독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 샤론 테이트 등을 난자, 학살하는 참극을 저지른다. 1967년은 그 전조(前兆)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던 해이며 시즌 드라마 <아쿠아리우스>는 그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1960년대를 통틀어 알게 되면 <아쿠아리우스>는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드라마이다. 거꾸로 이 드라마를 통해 1960년대의 미국 사회상을 알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모든 건 다 거기서 그치는 것만이 아니다. 이 드라마가 꼭 옛날얘기만 하고 있는 것일까. 그때의 얘기를 통해서 지금에 대해 말하려는 것은 아닐까. 보는 사람들 각자가 알아서 판단해 볼 일이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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