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이월드가 서비스 종료하면서, 온라인의 흑역사가 사라진다는 기쁨도 잠시, 지난 학기 내 수업을 들은 학생에게 <교수님은 스무살>에 기고 요청을 받았습니다. 무엇을 쓸까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탈향(脫鄕)의 이정표를 지나도 아득한 시간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저는 스무 살이 훌쩍 넘어 대학을 진학했고, 서른이 되기 전까지, 지금의 전공과 전혀 다른 길을 가려고 했었지요. 인문계 고등학교에서 자연계로 넘어와 대학 입시를 다시 준비했고, 뒤늦게 학부에 들어와서도 전공과 상관없이 신학대학원을 준비했었습니다. 군 복무 중에 크게 다쳐, 재활을 위해 매일 운동을 해야 했었습니다.

  그 굴곡진 시간은 20대의 흔한 허무주의와 만나 저를 길섶으로 자주 내몰았습니다.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노르웨이 숲>의 마지막 공중전화를 들고 있는 와타나베처럼, 혹은 섭종한 캐릭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방황하기도 했었습니다. 어느 순간, 경계인이 되었습니다. 어느 길에도 발을 올리지 못한.

  삶은 역설적입니다. 경계인이 되니, 여러 다른 세계를 낯선 눈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낯섦은 변증법적으로 사유의 틀을 확장합니다. 뒤늦게 과학을 공부하며 재미를 느낀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저는 유전학을 연구합니다. 유전학은 오랜 시간 여러 다른 관점들이 변주하듯 발전했습니다. 최근 파생된 대규모 유전체 데이터는 전통적인 모델을 현대적인 방법론으로 해석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래서 저는 생물학 연구자이지만, 전통적인 생물학 실험이 아닌 프로그래밍을 활용하여 연구하고 질문합니다.

  스무살을 소고하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길 위에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아직도 경계인입니다. 전통의 시각에선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저어하지 않습니다. “대학에 오고 나서 너무 혼란스럽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다들 길을 잘 찾아가는데 저는 안 그런 것 같거든요.” 작년 어느 학생이 면담에서 한 말입니다. 우리는 주로 대학입시라는 일편향적인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스무 살이 되면, 갑자기 새로운 세계가 주어집니다. 모든 방향으로 가도 되는, 가야 할 것 같은, 그런 세계 말이죠. 이제부턴 정답지가 없습니다. 삶은 새로움과 낯섦의 연속입니다. “저도 여전히 인생이 혼란스러워요...” 학생의 말에 대한 제 대답이었습니다.

  <교수님은 스무 살>에 적합한 글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낯섦을 포용할 학생들에게 글을 보냅니다. 동시에, “대학교수의 칼럼 연재는 흑역사의 단초라는 말에 제 스스로를 비끄러맵니다.

 

안준용 본교 교수·바이오시스템의과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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