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한강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러졌다.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에 나오는 시 한 편이다.

  누구나 한 번쯤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했을 때가 있을 것이다. 그 처절한 노력과 힘듦을 보상해주는 것은 결과이기에, 그 목표가 알고 보니 허상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린 좌절감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인생은 A를 투입하면 A'가 산출되는 정직한 시스템이 아닌지라, 일명 헛수고로 불리는 일들이 허다하다. 몇 년 뒤 되돌아보면 하나의 경험을 자리 잡을 테지만 한 목표를 보고 달려온 사람에게 헛수고라는 사실은 허망하기만 하다.

  이렇게 한 번 좌절을 겪고 나면, 다신 최선을 다하지 말아야 한다는 삐딱선을 타고 싶기도 하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무언가를 최선을 다해서, 목표를 세워서 해야만 삶을 삶답게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무수히 많이 겪어야 한다. 그럼 어쩌겠는가.

  삶이 힘들고 지쳐, 삶을 클린치’- 권투 경기에서, 상대방의 공격을 피하고자 껴안는 일-를 하거나, 내 눈두덩과 뱃가죽에 푸른 멍이 들더라도 그런 것들에 무뎌질 수밖에.

  그리고 그 멍들을 영광의 상처로 받아들이고, 허깨비를 이루는 것보다 그걸 이루려는 내 모습에 반해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뭐든 과도한 건 좋지 않다고, 보람차게 살려다가 눈앞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차가운 인간이 되진 않아야 한다. 적절한 멍은 나를 단단하게 하지만, 너무 멍투성이에, 작은 자극에조차 손뼈가 으스러지는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겉은 단단해 보이지만 속은 물러터질 것이다. 인생은 답이 없기에, 내 삶의 강도는 내가 정해야 한다.

 

김연서(문과대 영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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