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파선 선장으로 처량한 신세이던 나는 1992년 가을 돌파구를 마련하려고 노력 중이었다. 마침 20대 중반 휴가중 영덕도서관에서 만난 어떤 형의 말이 생각났다. 왜 도서관에 나오냐고 물었다. “대학원 입시 준비 중이라고그 형이 그랬다. 어려울 때에는 학교로 돌아가면 해결책이 나온다고 자기 지도교수에게 들었다고 했다. 문뜩 그 대화가 생각나 나도 다시 학교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선장이라는 직업을 살려 해상법을 해보기로 했다. 대학원 과정이었다. 마침 고려대를 목표로 했다.

  고려대는 내 작은 아버지가 졸업한 곳이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고려대 법대를 나오고 ROTC 1기로 육군 소위이던 작은 아버지는 우리들의 우상이었다. 술주정을 하시는 옆집 어른이 계셨다. 우리 집에 자주 와서 우리를 힘들도록 했다. 그럴 때 휴가 중으로 군복차림인 작은 아버지가 허리춤에 손을 얹고 고함을 지르면 그 아저씨는 슬금슬금 문밖으로 나갔다. 그래서 작은 아버지가 더 멋있어 보였다. 어른들 말로는 법대는 고려대가 최고라고 했다. 그래서 대학원은 고려대를 목표로 했다. 영어와 불어 그리고 법학이 시험과목이었다. 법학에는 민법총칙과 상법이 시험과목에 포함되어있었다. 대학 때 배운 불어를 다시 공부하기 위하여 학원에 6개월 다녔다. 대전의 한남대 도서관에서 근 1년을 대학원 입시준비 공부를 했다.

  토요일 오전이다. 출근을 하면서 좀 걷고 싶었다. 캠퍼스는 한적하다. 여름방학 중이기 때문이다. 일반대학원 건물이 높게 보이고 아래로는 3개의 계단 더미가 있다. 평소에는 아무런 의미없이 무심코 밟고 올라가던 계단이다. 오늘은 왠지 남다른 의미가 부여된다. 하나, , , , 다섯, 올라가는 계단을 헤아려본다. 주마등처럼 고려대와의 인연이 스쳐지나간다. 계단 하나 하나에 고려대와의 추억이 서려있다. 1993년부터 맺은 인연이니 벌써 30년이 되어간다.

  199312월 고려대 일반대학원 법학과 시험을 보았고 다행스럽게 합격했다. 마음씨 좋아 보이는 교수님의 연구실에 학생으로 들어갔다. 선생님께 특별히 허락을 받아 방의 조교가 되었다. 선장출신 연구실 방 조교는 고려대 역사상 내가 처음일 것이다. 밤을 낮 삼아 열심히 공부했다. 법학, 특히 해상법이 재미있었다. 석사를 마칠 무렵 좋은 법률사무소에 초빙되었다. 학업도 계속했다. 1999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바로 강단에 섰다. 미국에 유학을 다녀왔다. 더 큰 학자가 되고 싶어 고려대 법대에 학사편입을 해서 공부를 2년 더했다. 학위를 받은 지 꼭 10년 뒤인 2009년 고려대는 다시 나를 교수로 받아주었다. 고려대 법대 은사님들께서 도와주신 덕분이었다. 난파선 선장의 초라한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나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고려대 법대 교수의 자리가 면 단위 고등학교를 나오고 지방대학을 나온 나에게는 과분한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다행히 교수직이 잘 맞아서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고 연구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실무출신이니만큼 해운업계의 현안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014년 세월호, 2017년 한진해운 사태가 연달아 일어났다. 세미나 개최 및 발표, 언론 칼럼기고를 열심히 했다. 년간 7~8편의 논문은 꼭 작성했다. 교수의 직분인 강의와 연구 그리고 사회에 대한 봉사에 충실하려고 했다. 이런 저런 상도 많이 받으면서 인정을 받았다. 대학원의 직계 제자도 60여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는 사이 어느 듯 고려대에 교수로 온지도 12년이 되었다.

  어느 듯 나에게 남은 기간은 4년뿐이다. 여덟 학기가 지나면 나는 정든 고려대를 떠나야 한다. 정년퇴직이기 때문이다. 아쉽지만 그 다음은 또 다른 인생이다. 이제까지 원도 없이 한도 없이 강의하고 연구했다. 물론 내가 열심히 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모두 고려대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고려대라는 훌륭한 직장에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학교의 명성과 조직의 도움을 알게 모르게 받았다. 구성원인 동료교수, 제자, 학생들도 훌륭해서 큰 도움을 받는다. 이제는 내가 고려대라는 조직과 구성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아쉽게도 남은 여덟 학기 동안 진행 중인 연구를 잘 마무리해야 한다. 그리고 그동안의 성과를 잘 정리하여 후배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때라는 점을 생각하면서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어느새 신법학관 입구에 이르렀다.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고 생각하면서 304호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20208월 중순 어느날)

 

김인현 본교 교수· 법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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