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렘의 밍: 21가지 이야기 필립 워널 作, 싱글채널비디오, 작가 소장
할렘의 밍: 21가지 이야기
필립 워널 作, 싱글채널비디오, 작가 소장

 

  2000년 뉴욕 할렘가, 흑인 택시운전사 앙투안 예이츠(Antoine Yates)는 벵갈호랑이 (Ming)’을 불법으로 입양했다. 밍은 앙투안이 거주하던 공공임대 아파트 21층에서 생활했다. 같은 공간에서 식사하고 텔레비전도 같이 봤다. 야생성을 잃지 않도록 앙투안은 매일 신선한 날고기를 밍에게 줬다. 가장 큰방은 흙과 식물로 채웠다. 밍은 거기서 구르고, 긁고, 배설물을 뿌렸다.

  앙투안의 상처를 의심한 의사가 경찰에 신고하기 전까지, 3년의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아파트에서 같이 거주하는 이웃 누구도 이 사실을 몰랐다. 호랑이를 키워 이웃들을 위험에 처하게 했다는 죄목으로 앙투안은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밍은 동물원으로 옮겨졌다. 한순간 철장 생활, 밍과 앙투안은 그렇게 멀어졌다.

  영국의 영화감독 필립 워널(Phillip Warnell)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할렘의 밍(Ming of Harlem)>의 줄거리다. 필립 워널은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인간과 동물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 인간과 맹수의 영역이 중첩되는 공간, 아파트 21층에서 그들의 관계는 둘만의 방식으로 규정됐다.

 

군호도 8폭 병풍(群虎圖八幅屛風) 유삼규 作, 127×441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이 '군호도 8폭 병풍' 앞에 앉아있다. 이번 전시의 상당수 작품은 유 회장의 수집품이다. 그는 50여 년간 수집한 작품과 유물을 2003년 코리아나미술관을 설립해 전시하고 있다. 본교 교우회관에도 호랑이 작품을 기증했다. 유 회장은 ‘문화가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 강조하며 “한국의 문화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 말했다.
군호도 8폭 병풍(群虎圖八幅屛風)
유삼규 作, 127×441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유상옥 코리아나 회장이 '군호도 8폭 병풍' 앞에 앉아있다. 이번 전시의 상당수 작품은 유 회장의 수집품이다. 그는 50여 년간 수집한 작품과 유물을 2003년 코리아나미술관을 설립해 전시하고 있다. 본교 교우회관에도 호랑이 작품을 기증했다. 유 회장은 ‘문화가 있는 나라가 선진국’이라 강조하며 “한국의 문화적 수준을 발전시키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 말했다.

 

  시간을 돌려 조선시대,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으로 뒤덮인 한반도는 호랑이의 낙원이었다. 중국 속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조선 사람들은 1년의 반은 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사람 문상을 다니고, 1년의 반은 호랑이 사냥하러 다닌다.’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고, 호환(虎患)은 조선 사람들에게 마마(媽媽)와 함께 호환마마로 엮일 정도로 큰 재앙이었다.

  옛사람들이 쓰고, 그리고, 새기는 것에 호랑이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한국인과 호랑이는 한반도라는 공동의 공간을 두고 깊게 밀착돼있다. 일제강점기 야생 호랑이와 표범을 사살한 해수구제(害獸驅除)정책으로 상당수의 범이 절멸의 길로 들어서며 남한에 서식하는 야생호랑이는 현재 ‘0’마리지만, 여전히 영물, 산군, 호돌이, 고려대 등 다양한 상징으로서 남아있다.

  코리아나 미술관 특별기획전 <호랑이가 살아있다>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호랑이 관련 소장 유물과 회화, 동시대 작가들의 영상, 설치 작품 등을 모아 97일부터 1219일까지 전시를 진행한다. 실체는 없어도, 상징으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있는 호랑이를 살아있다고 말한다. 정말일까.

 

수호신 호랑이는 지금

맹호도(猛虎圖)황종하 作, 125x50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맹호도(猛虎圖)
황종하 作, 125x50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호랑이는 분명 강하고 잔인하다. 항상 피해를 보던 인간은 그 특성을 역이용해 호랑이를 자신을 보호하는 방패로 삼았다. 악귀와 재앙을 쫓고 질병을 몰아내는 수호신의 역할로 호랑이를 상징화한 것이다. 우석 황종하의 <맹호도>. 비스듬히 그려진 호랑이가 무언가를 향해 맹렬히 울부짖고 있다. 섬세한 붓 표현으로 쭈뼛 선 호랑이의 털이 바람에 날릴 듯한 형세다. 현관문을 마주 보는 거실에 이런 호랑이 그림을 걸어놓으면 풍수지리학적으로 집안의 불행을 막아준다고 했다.

  1970년대, 가전제품이 가정으로 속속 보급되면서 여가가 생긴 주부들에겐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그림이 그려진 도안에 짧은 털실을 엮어 만드는 스킬자수가 히트를 쳤다. 특히 개미표 니들포인트에서 대량생산한 호랑이 스킬도안은 도둑, 잡귀, 질병을 막아준다는 믿음 아래 전국적인 유행을 탔다. 털실로 재료만 바뀌었지, 굴곡진 호랑이의 맹렬한 형세가 살아있는 도안이었다.

 

가정맹어호: 남해금산한주예슬 作, 93x124cm, 작가 소장
가정맹어호: 남해금산한
주예슬 作, 93x124cm, 작가 소장

 

  하지만, 40년 넘는 세월 뒤에는 누렇게 바랜 액자만 남았다. 집안의 짐짝이 되고 나면 어느 골동품 가게를 전전해도 이상하지 않다. 시각예술가 한주예슬은 골동품 가게에 있는 스킬자수 작품들을 모아 재가공한 후 <가정맹어호>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랑이를 망부석처럼 표현하고, 털을 일부 뽑아내기도 했다.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무섭다. 한주예슬은 전쟁과 같은 현대사의 질곡에서 한반도를 지킨 이들의 존재감이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골동품의 짐짝처럼 왜소해졌다는 해석을 더했다. 그들의 존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나. 작가가 우리에게 묻는다.

 

세계 속의 우리, 호랑이

 

신비로운 동방의 샛별김기창 作, 88x66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신비로운 동방의 샛별
김기창 作, 88x66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하늘에는 용, 땅에는 호랑이. 용이 존엄한 왕을 표상했다면 땅의 제일인 호랑이는 신하, 즉 양반을 상징하기도 했다. 무관복의 흉배에 호랑이를 수놓고, 도전적인 모습을 부각해 젊은 군자로서 호랑이를 묘사하는 시도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조선후기 학정(虐政)이 이어지면서 사람들 시선에 양반은 더이상 존귀한 무언가가 아니었다. 민화, 고전 소설 등에서 호랑이가 우스꽝스럽고, 어수룩한, 만만한 대상으로 묘사되기 시작한 시점이다.

 

무호도(舞虎圖)오윤 作, 38x29.3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무호도(舞虎圖)
오윤 作, 38x29.3cm, 코리아나미술관 소장

 

  호랑이를 묘사할 때 더 이상의 겉치레는 필요 없었다. 대충 그려도 되고, 실수해도 된다. 호랑이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한민족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민중판 화가 오윤의 <무호도>는 호랑이가 춤을 추는 모습으로 민중적 애환을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에서 호랑이가 추는 춤은 살풀이. 액이나 재앙을 덜어주는 춤이다. 1986,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오윤은 호랑이의 역동적인 살풀이로 당시 민주화 운동으로 져버린 젊음을 위로했다.

호랑이는 살아있다백남준 作, 61x72cm, 개인 소장
호랑이는 살아있다
백남준 作, 61x72cm, 개인 소장

  서울올림픽, 평창올림픽의 마스코트도 호랑이 차지였다. 호랑이는 세계 속의 한국을 표상하기도 했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밀레니엄을 맞아 진행된 ‘DMZ 2000’ 행사에서 <호랑이는 살아있다>라는 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특별기획전의 전시명은 해당 작품에서 비롯됐다. 14분 가량의 영상에는 북한 체제선전용으로 제작된 호랑이 다큐멘터리, 호랑이 민화 등이 편집돼있다.

  클라이맥스엔 입으로 사이렌 소리를 내는 서양 오페라 가수 옆에서 휠체어에 앉아 민요 금강에 살으리랏다를 어눌하게 부르는 백남준의 모습이 그려진다. 뇌졸중 이후 마비 증세를 호소하던 그였다. 평생 서양 열강이 우세한 세계무대에서 경쟁해야 했던 백남준의 인생, 스스로를 호랑이에 빗대며 어떤 간섭에도 굴하지 않고 내 목소리를 내왔다는 자신감과 투지를 보여준다.

 

삶의 풍경 이은실 作, 180x488cm, 작가 소장
삶의 풍경
이은실 作, 180x488cm, 작가 소장

 

  수호신, 양반, 민중, 그리고 우리. 호랑이가 상징하는 것들을 쫓아가다 보면 결국 우리 자신으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질문이 바뀐다. 우리는 살아있나. 호랑이를 비판적인 상징으로 활용한 작품도 있다. 화가 이은실의 <삶의 풍경>이다. 전통적인 한국화 기법으로 어둠 속에서 쉽게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호랑이의 모습을 담았다. 가까이서는 형체도 잘 보이지 않지만, 멀리에선 호랑이 무늬가 확연하다.

  작가는 유교사회에서 출발한 한국이 자본주의 기반으로 팽창하면서 기괴한 인간상이 생겨났다고 봤다. ·효와 같은 유교적가치 이면에 자리 잡은 탐욕을 보수적인 한국화의 화풍으로 잡아냈다. 정신이 쭈뼛 서는 순간이다. 우리 호랑이 잘 살고 있나. 실체는 없지만 우리 곁에 영원한 호랑이, 그리고 나. 되돌아보고 싶다면, 호랑이를 계속해서 지켜보면 된다. 앞으로 우리 호랑이는 어떤 곳을 향해 포효할까.

 

글  ㅣ  이선우·이승은 기자 press@

사진제공  ㅣ  코리아나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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