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살에 직면한 설암 4

투병생활 녹여낸 에세이 펴내

살아가는 원동력은 결국

 

  “세상에 제 흔적 하나는 남기고 싶어 책을 쓰게 됐어요.” 암 투병과정을 책으로 쓴 한유경(국제대학원) 씨는 치료 후 재발 소견을 받았을 때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질까 두려웠다. “혀 절제 수술을 하고 말을 못하니까 답답해서 쓴 글들을 모았습니다.”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작년, 대학원 졸업과 원하던 직장 입사를 눈앞에 두고 있던 한 씨는 설암 4기를 선고받았다. 수술로 절반의 혀를 잘라낸 뒤 그가 마주한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수술 이후의 삶은 말하는 방법부터 먹는 방법까지 새로 배워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암병동 졸업생>은 그의 암 투병생활을 소상히 담고 있다. 암병동을 졸업한 뒤 허벅지 근육을 이식한 혀로 발음을 연습하고, 3개월마다 한 번씩 유서를 쓰며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내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유경 씨는 “암환자들이 하루 빨리 사회로 나올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설암 판정에 물거품된 꿈

  “혀를 잘라야겠는데요.” 담담하게 혀를 절제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 한유경 씨는 현실로 와닿지 않았다. 그저 몇 시간 동안 카페에 앉아 자신에게 찾아온 절망을 가만히 받아들여야 했다. “설암 판정을 받고는 허무함과 함께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몰려왔어요. ‘, 이제 죽어야겠구나싶었죠.” 암 치료를 받더라도 말을 하지 못할 확률이 높았다. 설암 4기 판정은 말하는 직업을 갖고 싶었던 28살의 그에게 사형선고와 같았다.

  설암 판정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한유경 씨는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바쁘게 살아가는 꿈 많은 학생이었다. 대학에 입학하고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은 카페를 차리는 것. 아르바이트를 몇 개씩 하며 바쁘게 돈을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언니와 함께 카페를 차리는 데 성공했다. 다음으로는 미국 유학을 목표로 삼았다. 언니에게 카페를 넘기고 태평양을 건넜다.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갔을 당시 샐러드 김밥, 샐러드 비빔면을 역 가판대에서 팔았어요. 사람들이 한국 음식에 관심을 막 가질 시기여서 상도 많이 받고 대학에서 강연도 했었죠.”

  교환학생을 다녀온 뒤에도 그는 여전히 바쁘게 시간을 보냈다. “당시에는 할 일이 많아 사흘에 한 번 잤어요. 구내염이랑 탈모 같은 걸 달고 살았는데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죠.” 혀의 통증도 그냥 넘기다 설암 4기를 마주하게 되자, 건강을 생각하지 않고 지낸 것에 후회가 남는다고 했다. “후배님들은 꼭 건강검진도 받고, 몸 상태를 신경 쓰며 공부했으면 좋겠어요.”

 

암환자로 산다는 것

  “저는 매일 암환자로 출근했습니다.” 암환자의 가장 중요한 일과는 오늘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것. 삼시세끼 잘 챙겨 먹고 불안감을 이겨내기에도 하루는 짧았다. 일만 하기도 벅찬데, 암환자가 마주해야 하는 어려움도 컸다. 혀를 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혀가 부어 손짓발짓으로 의사를 전달해야 했다. 십중팔구 불통이었다. 얼음팩을 가져다 달라는 몸짓에 히터를 트는 가족들 모습을 보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우리 가족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어요.”

  암병동을 나와도 암환자에겐 여전히 힘든 세상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아팠다. 방사선 치료로 까매진 피부와 숨을 쉬기 위해 목에 뚫어놓은 구멍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기 십상이었다. “언제는 한 번 만져봐도 되냐고 물어보면서 동물 취급을 받기도 했어요.” 혀의 절반을 잘라내 미각도 잃었다. 맛있는 걸 먹고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옛날얘기다. “맛있는 음식을 한 입 먹으면 스트레스가 바로 해소됐는데, 지금은 그러지 못하니 조금 아쉬워요.”

  주변 사람들의 응원을 받고, 나름의 방법을 찾아가며 암을 극복해나갔다. 투병 과정에서 친구들의 연락은 많은 힘이 됐다. 카페 문도 닫고 간호를 해준 언니에 대한 고마움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겨낼 원동력은 결국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가 더 많았다. “남한테 이만큼을 바라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해도 그만큼의 반응이 안 올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스스로 원동력을 찾아야 했다. 주로 좋은 글귀나 노래를 필사했다. “필사할 때 엄청 우는데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필사를 해요.” 가장 기억에 남는 필사로 해바라기의 노래 사랑으로를 꼽았다. “이 노래를 필사할 때가 제일 좋아요. 한 번 들어보세요. 불러드리고 싶지만 부르면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네요.”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

바람부는 벌판에 서 있어도

나는 외롭지 않아

- 해바라기 사랑으로

 

  암병동 졸업, 새로운 삶을 살다

  암병동 졸업, 완치 이후의 삶은 그전과 사뭇 다르다. 생활습관도, 하는 일도 달라졌다. 암투병 이후로 유서를 쓰는 습관을 가지게 됐다. “유서에는 보통 지금까지 고마웠으니까 내가 쓰던 핸드폰 누구한테 준다, 부모님께 죄송하다는 식의 내용을 써요. 제사상에 대한 내용도 쓰고요(웃음).” 3개월마다 유서를 갱신하는데, 미련이 사라진 내용은 지우면서 조금씩 고치곤 한다. 자연을 관찰하는 습관도 생겼다. “하루를 사는 게 예전보다 더 소중해졌어요. 그래서 매일 나무와 하늘을 보면서 단풍이 이만큼 들었네생각하는데 이런 게 소소한 행복을 주는 것 같아요.” 이름으로 발음 연습을 해서 생긴 습관도 있다. 선배님 대신 OO선배님, 야 대신 OO. 이름을 최대한 많이 불러주려 노력한다.

  한유경 씨는 암이 앗아간 것들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쓰는 중이다. 미각을 잃어 고춧가루 하나라도 혀에 닿으면 혀 전체에 통증이 오고 튀김을 먹으면 기름의 비린 맛만 남는다. “미각을 잃은 상황을 극복하려 나름대로 차랑 커피의 향을 즐기고 치아로 느끼는 감각에 집중하면서 저만 느낄 수 있는 맛을 탐구하고 있어요.” 예쁜 빵집과 찻잔을 보는 재미로 스트레스를 풀고, 암투병이 끝나고 키우게 된 강아지 완치가 복스럽게 먹는 모습을 통해 대리만족하기도 한다.

  <암병동 졸업생>을 펴낸 후에는 그를 찾는 곳이 많아졌다. 인터뷰도 하고, 요양병원의 암환자들과 책 모임을 가지며 소통한다. 대학원에 복학하고 연구를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친환경 연구를 하고 싶어요. 책을 한 권 더 쓸 생각인데 그 책도 친환경에 대한 내용일 것 같아요.” 그는 출판 과정에서 친환경 제지와 콩기름을 사용해서 인쇄를 했다. “저도 쉽게 할 수 있는 일인데, 다른 기업들은 하지 않는 것이 의문이에요. 연구도, 글도 환경에 이로운 방향으로 이어나가야죠.”

  암투병기를 책으로 엮은 암밍아웃을 통해 그가 바라는 점은 소박하다. “암밍아웃을 하니까 주변에서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다는 친구들의 이야기, 아픈 가족을 돌보며 공부를 하고 있다는 친구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오더라고요. 그 친구들이 이 책과 제 인터뷰를 통해 용기와 위로를 얻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승빈 기자bean@

사진박소정 기자chocop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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