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2008)가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다.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의 번역자이자 <존 롤스 정의론>(2018)의 저자인 황경식은 당시의 샌델 열풍에 대해 우리의 현실이 정의에 대한 열망이 절실했기에 그만큼 정의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시 속절없는 바람처럼 잠시 스치고 지나간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이다라고 말한다. 한국어 제목만 보면 <정의란 무엇인가>정의’(justice)에 대한 정의’(definition)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원제는 무엇을 하는 게 올바른 것인가?’(What is the right thing to do?)라는 질문이다. 실제로 저자 샌델은 이 책에서 정의 자체를 논하기보다는 정의의 구현을 위해 어떻게 토론해야 하는가를 논한다. 그래서 누군가는 이 책을 가리켜 정의(正義)보다는 쟁의(爭議)가 무엇인가, 쟁의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고 배우는 책에 가깝다라고 말한다. 황경식은 <정의론>의 입문서 격에 해당되는 <존 롤스 정의론>에서 한국 사회가 이다지 부정의한 것은 제대로 된 정의의 이론이 없어서가 아니라 정의를 실현하고 실행할 의지나 역량이 부족해서라고 말한다.

  롤스는 <정의론>에서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기회균등을 보장하는, 이른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구상하고 이를 보증해줄 사회구조 내지 사회체제를 모색한다. 그는 최소 수혜자 최우선 배려를 통해 정의로운 사회를 구상한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사회는 실질적 기회균등이 보장된 자유주의 사회다. 이 사회는 형식적 기회균등이 보장되는 자유방임사회와 차별된다. 자유방임사회는 자연적인 자유체제로서 효율성을 중시하고 자연적 운과 사회적 운을 방치한다. 반면 자유주의 사회는 자유주의적 평등체제로서 자연적 운은 방치하지만 사회적 운은 완화하려 한다. 요컨대 롤스가 생각한 정의로운 사회는 운의 중립화와 최소수혜자의 최우선 배려를 전제로 공정한 기회균등의 사회다. 이 사회는 민주적 평등체제이고, 절차적 정의와 결과적 정의의 보완을 통해 자연적 운과 사회적 운이 완화된다.

  롤스의 정의론은 한마디로 자유주의적 평등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는 논증을 통해 정의의 두 원칙을 도출한다. 1원칙은 평등한 자유의 원칙이고, 2원칙은 차등의 원칙이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은 말 그대로다. 즉 각 개인은 다른 사람들의 유사한 자유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2원칙은 차등의 원칙이다. 그런데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은 다음 두 조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즉 정의로운 저축 원칙과 양립하면서 최소 수혜자에게 최대의 이익이 되어야 하고, 공정한 기회균등의 조건 아래 모든 사람들에게 개방된 직책과 직위가 결부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제1원칙은 평등한 시민의 기본적 자유가 희생되는 것을 거부하는 롤스 이론의 자유주의적 핵심을 나타낸다. 2원칙은 자유주의적 자유들이 사회적으로 불리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유명무실한 공수표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한 조건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공정과 정의의 토대가 흔들리면서 각 개인 더 나아가 공동체에 대한 믿음도 흔들리고 있다. 다양한 사회적 갈등으로 고통을 받고 있다. 계층 갈등은 물론이고 세대 갈등 또한 심각하다. 지금의 이런 여러 가지 어려운 문제와 갈등은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슈퍼히어로나 불세출의 뛰어난 지도자에 의해 해결될 수 없다.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갈등은 그렇지 않다. 갈등은 단어 그대로 서로 얽혀 있기에 한 번 풀었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다시 얽힌다. 즉 갈등은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풀고 조정하는 것이다. 갈등을 풀고 조정하는 것은 법보다는 상식에 바탕을 둔 공정과 정의다. 지금이야말로 공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그 원칙을 세울 때다. 롤스의 <정의론>이 공정과 정의에 대한 완벽한 모범답안이 될 수는 없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적 방법을 고민하는 출발점은 충분히 될 수 있다.

윤정용 초빙교수·글로벌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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