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리움>

별점: ★★★★☆

한 줄 평: <블랙 미러>를 좋아한다면 더할 나위 없을 작품


  함께 살 집을 구하는 한 쌍의 커플, 젬마와 톰은 수상한 중개인을 따라 욘더라는 마을로 가게 된다. 르네 마그리트의 화풍을 똑 닮아 장난감 혹은 세트장을 연상시키는 이 마을에서 중개인은 같은 외형의 수많은 집 중 하나인 9호로 그들을 안내하며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젊은 부부에게 완벽한, 오래 살 집입니다.” 집을 둘러보던 중 중개인은 갑자기 사라지고, 젬마와 톰은 욘더를 빠져나오려 하지만 같은 곳을 맴돌기만 한다. 떠나도 다시 잡혀 오고 불태워도 다시 살아나는 좀비 같은 9호에서의 아포칼립스 생존기가 시작된 것이다. 미지의 누군가가 제공하는 식량으로 연명하던 어느 날, 그들은 집 앞에서 신생아가 담긴 상자와 아이를 키우면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는 문구를 발견한다. 과연 아이를 무사히 키워 탈출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저채도 고명도의 발랄한 화면구성과 상반되게 영화는 줄곧 기괴하고 섬뜩한 분위기로 진행된다. 도입부는 다른 새의 둥지에서 부화한 뻐꾸기가 원래 둥지의 작은 새들을 나무 아래로 떨어트리는 장면으로 호흡을 이끈다. 어떤 새가 다른 새의 집에 알을 낳아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일. 이를 탁란(托卵)’이라 한다. 요구를 달성할 때까지 소리를 지르고, 저들의 대화를 흉내 내며 조소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대신 품어 기르도록 하는 일. 역시 탁란일까. 그렇다면 다른 새의 둥지에 몰래 알을 낳듯 아이를 던지고 간 새는 누구일까. 영화는 명쾌한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불친절하고 텁텁한 장면의 연속에서 다만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계속 제공할 뿐이다.

  혹자는 이 영화를 두고 타성적인 가정 형성 과정의 메타포라 할 수 있겠다. 우리 사회에서 고질적으로 유지되는 정상 가족의 규범과 일과를 반복하며 타성에 젖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렸다고. 물론 어느 정도 일리가 있다. 감정 없이 아이를 기르는 주인공들의 모습은 표정을 잃고 명령을 수행하는 현대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나는 조금 다른 측면에서 접근하고 싶다. 감독이 탁란이라는 소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어떤 이는 영화의 후기 글에서 탁란의 시대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삶에 교묘히 파고들어 인식과 행동 기저의 동기를 조종하는 것들은 인류의 탄생과 시대의 발전 아래 꾸준히 존재해왔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나무 아래로 떨어져 죽은 새를 보는 학생에게 젬마는 자연의 법칙이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탁란의 시대를 사는 우리도 그 법칙에 매몰될 수밖에 없는 자연의 산물이자 미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둥지 밖으로 쫓겨나 죽을 날만 기다리는 것은 옳지 않을 테다. 젬마와 톰은 비바리움(vivarium; 동물 사육장)에 갇혀 탈출을 꿈꾸며 각자의 방법으로 희미한 내일을 그려냈다. 이들에게 자신을 투영하여 자신에게 끝없는 물음을 던져보는 것은 어떨까. 이곳은 어디인가? 이것은 나의 의지인가?

  영화는 축축한 여운을 남긴다. 누군가는 이 축축함에 불쾌감을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습지를 걷는 기분으로 물 자국을 차분히 밟아가며 저마다의 해석을 곱씹는다. 의도치 않게 여백이 길어진 요즘, 이 영화를 도화선으로 당신의 사유가 물감처럼 번져 그 자리를 채우길 바란다.

김나경(미디어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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