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매의 여름밤>
<남매의 여름밤>

별점: ★★★★★

한 줄 평: 어쩌면 우리 모두가 보내온 그 시절의 이야기


  이제는 희미해진 어린 시절의 기억 한 조각이 있다. 물방울이 맺힌 포도알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겨 내 입에 넣어주시던 할머니. 그 여름날의 습한 공기, 하염없이 돌아가는 선풍기 소리, 더위에 칭얼대는 어린 나를 보듬어주는 할머니의 손길. 영화 <남매의 여름밤>은 이런 기억을 소환시킨다. 삶의 어느 목차, 어떤 대목에 서툰 글씨로 삐뚤빼뚤 쓰여 있는 그런 기억 말이다. 이 영화는 펼쳐본지 오래되어 먼지가 소복하게 쌓여있는 그 페이지로 우리를 데려간다.

  영화의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남매의 여름밤>에는 두 쌍의 남매가 등장한다. 옥주와 동주 남매, 그리고 둘의 아버지 병기와 고모 미정. 영화는 옥주네 세 식구가 할아버지 집에 오면서 시작된다. 그 오래된 2층 양옥집에는 고모까지 함께 머물게 되고, 여름의 흐름을 따라 가족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작은 남매는 아버지의 장난으로 아침을 시작하고, 대낮의 햇볕 아래에서 할아버지와 방울토마토를 따고, 포도를 나눠 먹으며 깊어가는 밤을 함께 보낸다. 지극히 일상적인 순간들과 함께 가족의 시간은 서서히 물들어간다. 여름날의 가족을 사려 깊고 다정하게 그려나가는 이 영화의 호흡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는 우리의 가족들이 지나왔거나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의 순간들을 마주하고 있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카메라의 시선은 주로 고정되어 있고 그 프레임 속에서 인물들이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이는 옥주네 가족이 지내는 옛 양옥집이 마치 감정을 가진 하나의 캐릭터로서 이 가족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영화의 관조적인 시선은 인물들과 관객 사이에 거리를 만들어내는데, 그 틈 속에서 관객들의 기억은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모기장 안에서 여름밤을 지새우는 옥주를 보고 떠올리는 저마다의 기억이 그러하다. 성장통을 겪기도 하고 끝이 없는 꿈을 꾸기도 하며 몸을 뒤척였던 유년 시절 어느 여름밤의 기억.

  두 남매는 기억을 꿈처럼, 또는 꿈을 기억처럼 품고서 살아간다. 이들의 기억과 꿈에는 되돌릴 수 없는 그리운 순간, 그리운 사람이 있다. 할아버지가 어린 날의 아버지에게 했던 장난이 아버지의 꿈에 등장하고, 고모는 일찍 여의어 기억에 없는 할머니를 자꾸만 꿈속에서 마주한다. 옥주의 티셔츠에는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Love is so short, forgetting is so long.” 사랑은 그다지도 짧고, 망각은 그처럼 긴 것. 옥주와 동주가 할아버지와 가까워진 시간은 한 달 남짓이지만, 할아버지가 남매의 곁을 떠난 후에도 그 순간들은 오래도록 그들의 삶에 남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와 고모가 그랬고, 우리가 그랬듯이. 작은 남매가 자라 어느덧 큰 남매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들의 꿈에는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던 그 여름방학이 불현듯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외로운 순간이 오더라도 <남매의 여름밤>만큼은 언제나 곁을 지키겠습니다.” 이 영화를 만드신 윤단비 감독님의 문장이다. 내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어느 여름날의 잔상과 함께 이 영화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계절이 지나 또다시 다가 올 여름밤을 기다리며 오늘은 잠들기 전, 두 남매의 여름밤을 한번 들여다보는 게 어떨까. 당신의 꿈에도 여름날의 그리운 순간, 보고 싶은 그 사람이 찾아올지도 모르니.

이채연(미디어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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