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이 대화의 종착지는 어디일까.

  잘못 하나 없이 살아왔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어쩌다 보니 사과를 하는 일보다 받는 일이 더 잦았다. 특히 신문사의 부장이 되어 책임의 무게가 가중된 만큼, 지적사항은 끊임없이 생기고 무수한 사과를 돌려받는다. 한 명 한 명의 사과가 허리께까지 내린 눈처럼 쌓인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사과에는 한 마디 만에 용서를 말하고, 다른 누군가의 사과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허탈감에 말꼬리를 잡게 된다. 그렇게 한참을 지적하다가 애매하게 논쟁이 끝나면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후회만 남는다. 조금만 참을 걸, 조금만 덜 사납게 말할걸.

  대개 사과문의 정석이라 하면, 사건이 발생한 경위에 대해 육하원칙에 맞게 작성하고, 해명이나 변명을 의도하는 문구가 없는 사과문을 일컫는다. 공인이 사회적으로 일으킨 물의에는 이런 사과문이 때때로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도 이러한 사과문이 해소의 열쇠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소통 행위인 사과에서 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답답함은 커지고 분노가 뒤따른다. 사랑하는 사람의 잘못일수록 아쉬움과 분노는 커진다. 속마음을 감춰보려 애써 가시 돋친 말을 내뱉는다뭐가 미안한데?”는 더 이상 질문이 아니다. 가시를 감추려 물음표를 붙인 내 말은 결국, 너를 너무나도 아껴버린 나에 대한 측은함과 나한테 기울어진 시소 끝에서의 발악으로 변모한다. 너를 찌르려던 가시는 결국 나를 찌른다.

  잘못이 반복될 때마다 미안하다는 말이 쌓인다. 습관적인 미안하다에서 미안함은 조금씩 휘발돼 버린다. 모순적이게도, 가장 진심이 덜 담긴 최후의 미안하다로 대화는 쉽게 마무리된다이 대화를 끝낸 건 더 이상 <>이 아니다. 이미 모든 기대와 애정을 다 갉아버린 과거의 잘못들이다.

  사과에 맞서 괴물이 되어버린 나를 보고 있는 것이 괴롭다.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우리 관계를 지켜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후회가 나를 찾아온다. “미안하다라는 말이 성에 안 차면, 대체 어떤 말이 내 성에 찼을 것인가. 나는 대체 어떤 대답을 원했던 것일까. 정답 없는 대답에 집착해 꽥 소리를 내는 내 목소리가 밉기만 하다.

  그런데도 다음번 미안하다에 나는 또 화를 내고 말아버린다. “미안하면 다야?” 아직 놓아버리지 못한 애정의 찌꺼기가 악취를 풍긴다.

  미안해야 할 건 마음을 덜 준 너일까, 덜 받았다고 생각하는 나일까.

이윤 디지털콘텐츠부장 profit@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