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계 10주기, 작가 박완서가 그려낸 서울

박완서 작가의 생전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 박완서의 말
박완서 작가의 생전 인터뷰를 엮은 대담집 <박완서의 말>

 

  “죽고 싶다, 살고 싶다…. 두 상반된 바람이 똑같이 치열해서 어느 쪽으로도 나를 처리할 수 없었다” - <나목> 中

 

  사람과 삶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탐구한 소설가, 박완서 선생이 올해로 타계 10주기를 맞았다. 40세에 장편소설 <나목>으로 등단한 박완서 작가는 담낭암으로 생을 마치기 직전까지도 펜을 놓지 않았고, 약 80편의 단편과 15편의 장편소설을 남겼다. 40여 년에 걸쳐 다듬어지고 완성된 그의 작품 세계를 재조명하려는 노력이 한창이다. 서울도서관에서는 박완서 문학을 다시 읽는 강좌를 제공하며, 각종 출판사는 개정판, 결정판의 이름으로 선생의 옛 작품들을 새롭게 내보인다. 정치권에서는 세태를 비판하는데 그의 언어를 빌리기도 한다. “대가는 되고 싶지 않아도 그냥 현역작가로 살다가 죽고 싶은 소망이 있었습니다. 은퇴한 작가가 아니라 현역작가로….” 10년이 지나도 박완서 작가를 잊지 않는 움직임이 현재 진행형인 것을 보면, ‘영원한 현역’이고 싶다던 그의 바람이 이뤄지는 듯하다.

  작가 박완서를 설명하는 키워드 중 하나는 ‘시대의 산증인’이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과 분단, 전쟁과 개발까지 우리 현대사의 가장 핵심적이고도 시린 사건들을 몸소 체험하고 작품에 녹여냈다. 송은영 前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는 박완서의 문학세계를 “한국 현대사의 문학적 증언”이라고 칭하며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 산업화와 도시화의 흐름을 타고 살아가는 다양한 인간들을 생생하게 담아냈다”고 설명했다.

  아픈 역사의 집결지이자 작가의 오랜 근거지였던 서울은 그의 소설 대부분의 중요한 배경이다. 그중 유년의 기억을 키웠던 서대문구 현저동, 6·25 전쟁의 발발로 학교를 그만두고 생업을 이어나가야 했던 중구 미군 PX, 중산층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했지만 안타까운 도시개발 현장을 목도해야 했던 송파구 방이동 등은 당시 서울의 시대상과 특징을 그려내는 데 탁월한 공간으로 기능했다. 세 장소에서 박완서 선생이 겪었던 시대와 그 시대를 채웠던 사람들의 자취를 좇았다.

 

가난·전쟁·개발로 그늘진 서울

직접 체험하고 생생하게 그려내

절망 속에서 생명력 포착하기도

 

①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1992) - 서대문구 현저동

  뒤따라오던 지게꾼이 거진 다 왔느냐고 숨찬 소리로 물었다. “아아, 조금이 어디냐니까요?” “조오기, 현저동….” 엄마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그 자리에 딱 버티고 서더니 누굴 놀리냐고, 그 산꼭대기를 누가 그 돈 받고 가냐고 눈을 부라렸다. (중략) 집들도 층층다리처럼 비탈에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곧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이상한 동네였다.

 

  ‘독립문로터리’, ‘서대문구 형무소’ 등 역사의 현장을 실감케 하는 3호선 독립문역의 출구들 사이, 다소 무난하고 일상적인 이름의 3-1번 출구 ‘무악 현대아파트’가 있다. 현재 무악 현대아파트가 위치한 자리는 8살의 어린 박완서가 서울로 처음 이사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다. 포장된 도로 위 널찍이 공간을 두고 늘어선 아파트 단지는 ‘층층다리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는 소설 속 현저동 판자촌과는 괴리가 있다. 위쪽 단지를 올라가려면 여전히 가파른 계단과 언덕을 넘어야 한다. 높은 길은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지, 노년 부부가 가쁜 숨을 내쉬며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아직 개발되지 않은 낡은 주택들도 듬성듬성 보였다. 흘러버린 세월 속 소설과 달라지지 않은 풍경들을 더듬어 가며 박완서의 현저동을 짐작했다.

  1992년 발간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하 <싱아>)는 박완서 작가의 유년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자전적 소설이다. 자서전 대신 소설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은 60대인 작가가 오래된 기억의 빈칸을 메꾸기 위해서는 허구적 재현이 불가피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황해도인 경기도 개풍군 박적골에서 태어난 박완서는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남편의 죽음이 시골의 구식 사고관에서 비롯됐다고 여긴 어머니는 열 살 위인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떠났고, 2년 뒤에는 박완서도 서울로 데려왔다. 소설에는 작가가 서울에 처음 도착하고 느낀 소회, 일제강점기 국민학생으로서의 기억, 창씨개명 경험, 6·25 전쟁의 아픔 등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재개발 이전 서대문구 현저동의 모습.​​​​​​​박완서 작가의 가족이 서울에 처음 '말뚝'을 박은 곳이다.
재개발 이전 서대문구 현저동의 모습.박완서 작가의 가족이 서울에 처음 '말뚝'을 박은 곳이다.

 

벗어나고 싶지만 머무르고 싶은

  <싱아>에는 사대문 안과 바깥이라는 뜻의 단어 ‘문안’과 ‘문밖’이 자주 등장한다. 성곽도시였던 서울의 공간적 특성 때문에 특수하게 사용되는 표현들이다. 일제강점기에도 서울의 ‘문안’에는 아무나 쉽게 거주하지 못했다. 아들 딸 교육을 위해 맏며느리 자리도 박차고 서울로 올라온 어머니였지만, 가난만큼은 해결할 도리가 없었다. ‘문밖’의 현저동에 정착한 어머니는 어린 딸에게 ‘문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대문 안쪽에 있는 매동국민학교에 보내기 위해 불법으로 주소지를 이전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주인공은 날마다 산 너머 사직동으로 고독한 등굣길을 걸어야 했다.

  박철수(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는 “박완서의 작품에서 반복되는 ‘문안과 문밖의 대립의식’이 오랫동안 서울의 종주성을 명료하게 하는 도구가 됐다”고 말했다. 나아가 문안이 문밖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의식이 서울의 도시공간 확장과 관련해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설명한다. 그는 “해방 이후 서울로 편입하거나 서울에 이미 거주하고 있는 사람들은 문안으로의 편입을 바랐고, 이러한 경향이 결국 주택부족을 심화시켜 주거공간의 확장을 초래했다”고 전했다.

  현저동이 벗어나고 싶은 장소로만 그려진 것은 아니다. 서울에 올라와 처음 ‘말뚝’을 박은 장소라는 점에서, 그 주변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가족이 애착을 가지는 곳이다. 김영미(홍익대·국어교육과) 강사는 “에서 주인공 가족은 오빠의 부상으로 인해 1·4후퇴 당시 피난을 가지 못하게 됐을 때 다시 현저동으로 돌아간다”며 “작가와 가족이 서울에서의 고향으로 여긴 곳”이라고 말했다. 송은영 교수도 “현저동은 박완서에게 도시 안에서 더 나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욕망을 가르쳐준 곳이자, 도시에 마음을 붙이고 정착하는 방법을 알려준 장소”라고 설명했다.

 

② <나목> (1970) - 중구 명동, 종로구 계동

  한국은행 사거리 한복판에서 360도 돌면 한국은행, 중앙우체국 등 명동 번화가의 역사를 책임졌던 건물들이 파노라마처럼 담긴다. 남산타워를 바라보고 서면, 오른쪽 신세계 백화점 본점이 눈에 들어온다. 벽돌 느낌의 회색 외관은 근대 건축물 특유의 고풍스럽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긴다. 이곳이 옛 느낌을 주는 건 단지 외적 모습 때문만은 아니다. 대한민국 백화점 중 유일하게 본점의 옛 건물을 쓰고 있는 명동 신세계 백화점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 물품이 직수입 돼 들어오던 미쓰코시 백화점이었고, 6·25 전쟁 때는 미군 물품을 판매하는 PX로 쓰였다. 시대에 따라 간판과 용도를 달리하며 한국 근현대의 오랜 역사를 함께해온 장소다. 바로 그 미군 PX 지하에, 전쟁으로 오빠를 잃고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20살의 박완서가, 그리고 그의 분신인 의 주인공 이경이 있었다.

 

  1950년 9.28 수복 직후의 서울. 미군을 상대로 초상화를 그려 파는 가게의 점원 이경은 6·25 전쟁 중 두 오빠를 잃고 홀어머니와 단둘이 살고 있다. 그녀는 두 오빠가 자기 때문에 폭격으로 죽었다는 죄책감과 삶의 의욕을 상실한 어머니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러던 중 초상화 가게에 화가 옥희도가 새롭게 들어온다. 옥희도는 <빨래터>로 잘 알려진 박수근 화백의 분신이다. 이경은 속물적인 여느 화가들과는 다른 옥희도에게 마음이 끌린다. 한편 PX의 전기 수리공 황태수는 계속해서 이경에게 구애를 한다. 하지만 이경은 태수에게 별 감정을 가지지 못한다. 이경은 옥희도와 매일 명동의 장난감 가게에서 만나 함께 있는 시간을 즐기고, 결국 옥희도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유부남인 옥희도는 이를 거절한다. 예술가 옥희도, 수리공 황태수, 그리고 본인의 일탈과 탈출을 도와줄 수 있는 미군 헌병 죠오의 굴레 속에서 끈질기게 고민하던 이경은 결국 태수와 결혼하여 가정을 꾸린다.

박완서와 그의 분신 이경이 일했던 미군 PX(왼쪽 사진). 현재는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바뀌었다(오른쪽 사진).
박완서와 그의 분신 이경이 일했던 미군 PX(왼쪽 사진).
현재는 명동 신세계백화점 본점으로 바뀌었다(오른쪽 사진).

 

절망적인 오늘을 살아낸다는 것

  “나는 종종걸음으로 어두운 모퉁이를 재빨리 벗어나 환한 상가로 나섰다. PX를 중심으로 갑자기 발달한 미군 상대의 잡다한 선물 가게들 - (중략) 주인 없는 집이 아니면 중앙우체국처럼 다 타버리고 윗구멍이 벙 뚫린 채 벽만 서 있는 집들, 이런 어두운 모퉁이에서 나는 문득문득 무섬을 탔다.”

 

  백화점을 나와 중앙 우체국을 거쳐 을지로, 화신 백화점, 계동의 고가까지 이어지는 소설 속 이경의 퇴근길은 이젠 많은 것이 변했다. ‘윗구멍이 벙 뚫린’ 중앙 우체국은 포스트 타워라는 세련된 건물로 탈바꿈했고, 화신 백화점이 있던 자리에는 독특한 모양의 종로 타워가 생겼다. 전쟁의 상흔은 70년 세월에 씻겨 말끔하게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도로의 양쪽을 가득 메운 고층 건물과 점심시간을 맞아 잠깐의 휴식을 즐기러 온 듯한 직장인들의 활기가 대신했다.

  방민호(서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이경은 PX와 고가라는 두 간극을 오가며 현실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었던 여인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계동의 고가는 두 오빠의 죽음이라는 비극과 오빠 위주로만 삶을 생각하는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사라져야할 운명의 전통을 뜻한다. 한편, PX부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죽음과 절망이 가득 찬 세계 속에서 유일하게 물질이 오가는 곳으로, 풍요로운 미국으로 떠날 수 있는 항구 같은 역할을 한다. 한국인으로서의 자신을 버리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고가에서 PX로, PX에서 고가로 왕복하는 사이에서 이경은 쉼 없이 고민하고 또 아파한다.

  하지만 이경은 전쟁 중에도 끊임없이 화업을 이어나가는 옥희도를 통해 ‘이 세계를 견디면서 현재의 삶에 보람을 만들어 나가는 것’의 의미를 배운다. 이경은 훗날 옥희도의 유작전에 가서 지난날 옥희도 자가에서 보았던 그의 그림이 죽은 고목이 아니라 봄을 기다리며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나목이었음을 깨닫는다. 방민호 교수는 “과거와 미래를 상징하는 두 공간 사이의 진자운동을 넘어서는 길찾기가 바로 <나목>의 주제의식”이라고 설명했다.

 

③ <꽃을 찾아서> (1986) - 송파구 방이동

  올림픽공원 입구에 세워진 평화의 문을 등지면 같은 이름의 고층아파트가 빼곡이 시야를 메운다. 거기에 깨끗하고 여유로운 거리까지, 편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강남’의 이미지다.

  하지만 1960년대의 강남은 지금과 달리 개발이 되지 않은 농촌이었다. 폭발적으로 증가한 강북의 인구를 분산한다는 명목 아래 1970년대부터 강남 개발이 단행됐다. 주택건설촉진법 등의 정부 정책으로 아파트 대량 공급 체제가 갖춰지기 시작했고, 강북까지 이어지는 다리가 건설되면서 교통도 편리해졌다. 1976년부터는 명문고들이 강남으로 이전하며 ‘강남 8학군’이 조성됐고, 강남과 강북의 격차는 더욱 벌어졌다. 1970년부터 1999년까지 강북 인구가 430만 명에서 520만 명으로 1.2배 정도 증가한 데 비해, 강남 인구는 120만 명에서 510만 명으로 4.2배 증가했다. 박철수 교수는 “서울의 물리적 토대와 기반을 구축했던 1970년대는 본격적으로 ‘강남북 시대’를 연 시기”라고 말했다.

 

그 곳의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88년 개최된 서울 올림픽도 강남의 발전을 촉진했다. 단편소설 는 아시안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개발이 한창이던 지금의 송파구 방이동을 배경으로 한다. 전직교장이었던 장명환 씨는 여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를 한 수학선생을 고발해 정년을 2년 남기고 갑작스레 사직하고, 그 해에 막내딸과 아들이 한달 사이를 두고 결혼을 하는 바람에 방이동 다세대 주택으로 평수를 줄여 이사했다.

 

  “철거가 진행중인 동네는 폭풍이 난타하고 간 것처럼 심하게 망가져 있었다. (중략) 부랴부랴 이사들을 떠난 듯 가난한 사람들이 끝까지 아껴두었던 쓰잘 데 없는 것들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중략) 그런 것들보다 더욱 보기 민망한 건 그 갈피갈피에 남아서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아직도 못 떠난 사람들이었다.”

 

  장명환 씨는 불도저를 피해 떠나는 사람들과 그럼에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목도하며 혼란스러워 한다. 서민과 빈민을 위한 임대주택 대신 분양 중심의 아파트 건설이 주된 사업이었던 강남의 개발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특히 불친절했다. 송은영 교수는 가 도시개발이 낳는‘망각’의 효과를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작품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이윤추구를 향해서 움직이는 도시개발은 역사에 대한 망각을, 체험과 기억의 소멸을,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억상실을 동반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땅 위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삶에 대한 망각”이라고 말했다.

 

  박완서 작가에게 서울은 생명을 짓누르는 폐허적 현실과 생명력을 간절히 원하는 욕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현장이다. 식민지와 분단, 개발의 상처로 얼룩졌던 시대에도 다른 사람의 아픔을 보듬고 내일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방민호 교수는 “전쟁과 개발은 도시를 황폐화시키고 이기심과 속물의식을 불러일으키지만, 박완서 작가는 이와 맞서 싸우는 양심과 휴머니즘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박완서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이러한 현장을 들추어내어 기록하고 기억했다는 데 있다. 작가이기 이전에 당대를 살아갔던 사람. 과거를 재현하는 일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잊지 않는 것’의 미덕을 몸소 실현했던 소설가의 정신을 후대를 살아가는 우리도 길이 기억해야 할 것이다.

 

글 │ 성수민 문화부장 skycastle@

사진출처 │ ‘마음산책’ 출판사, 서울사진아카이브,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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