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작은 물결이 민족의 큰 파도로 출렁일 때까지
어린이라는 작은 물결이 민족의 큰 파도로 출렁일 때까지
  • 이다연 기자
  • 승인 2021.05.02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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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영원한 벗, 소파(小派) 방정환 선생

고려대 전신 보성전문 입학해

아동문학을 발전시킨 독립운동가

민족의 희망을 어린이에게서 찾다

방정환 선생이 창간한 잡지 월간 '어린이'
방정환 선생이 창간한 잡지 월간 '어린이'

 

  “새와 같이 꽃과 같이 앵두 같은 어린 입술로 천진 난만하게 부르는 노래, 그것은 그대로 자연의 소리이며, 하늘의 소리입니다.” -<어린이>지 창간호 첫머리

 

  아동운동단체 ‘천도교소년회’가 창립된 지 올해로 100년을 맞이했다. 다가오는 2022년은 어린이날이 제정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이 모든 역사의 중심에 소파 방정환 선생이 자리한다.

  5월은 어린이와 스승을 기억하는 달이다. 어린이의 영원한 벗이자 민족의 스승, 소파 방정환 선생은 고려대의 교우기도 하다. 소년운동뿐 아니라 민족운동과 아동문학에도 큰 족적을 남긴 방정환은 어린이 교육인, 언론출판인, 동화구연가, 독립운동가로 다양한 활동을 펼친 지식인이었다.

 

‘법과 18학번’ 방정환의 민족운동

  방정환 선생은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1918년 입학했다. 이는 당시 보성전문학교 이사장이자 천도교 교주였던 장인 손병희의 권유로 이뤄졌다. 1920년 방정환 선생은 보성전문학교 학생친목회(오늘날 학생회)의 문예부장이자 천도교청년회 회원으로 교내외에서 활동했다. 3.1운동과 조선학생대회 강연에 참가한 행적으로 일제의 요시찰 대상이 된 방정환은 끝내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퇴학당했다. 비록 학위를 끝마치진 못했지만, 1999년 본교는 방 선생의 민족적 헌신을 높이 평가하며 명예학사를 수여했다.

  방정환 선생은 누구보다도 민족계몽에 앞장섰던 독립운동가였다. 보성전문 재학 당시 방 선생이 창설한 경성청년구락부는 민족운동에 뜻을 둔 10대 청년들이 모여 만든 비밀조직이다. 이 단체는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문예 동인지 <신청년>을 간행하며 1920년대 초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2019년 본교에서 진행된 소파 방정환 선생 탄생 120주년 기념식에서 최동호(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독립운동가 방정환’의 면모를 집중 조명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방정환의 민족운동과 어린이운동은 3.1운동을 주도한 천도교의 보성전문에서 시작해 민립대학의 성격이 가미된 보성전문, 그리고 광복 후 현재까지 이어지는 고려대학교의 변천사에 정신적인 모태로 작용했다.

  방정환 선생은 보성전문 재학 당시 교내신문인 <조선 독립신문>을 배포하며 독립의 중요성을 확고히 다졌다. <조선 독립신문>은 기미독립선언서를 비밀리에 발표하고 3.1만세운동을 최초로 보도한 항일기 지하신문 중 하나다. 독립신문 출판 및 배포 혐의로 일제에 체포돼 온갖 고문을 받았지만, 방 선생은 석방 이후 독립신문 발행을 계속했다. 최동호 교수는 방정환 선생을 “20세기 한국민족의 역사와 아동문학사는 물론, 고려대학교의 정신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자랑스러운 교우”라고 칭했다.

 

고려대 연극의 효시, 방정환의 ‘동원령’

  연극 ‘동원령’은 방정환 선생이 보성전문에 입학한 1918년에 창작하고 경성청년구락부 회원들과 공연한 작품이다. 방 선생이 극본, 연출은 물론 주연배우로 출연하기까지 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학생이 연극을 창작해서 공연한 사례는 ‘동원령’이 처음이며, 이는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역사의 시작점으로 여겨진다.

  연극 ‘동원령’은 가난한 농부가 병든 아내를 위해 약을 지으러 간 사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가 집에 들이닥쳐 부엌에 있는 밥솥을 떼어 가버리고, 돌아온 농부는 아내를 위로하며 결국 가족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기로 한다는 내용이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온 민족이 총동원돼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은이 연극은 뒤에 있을 3.1운동을 예비하는 계몽극이었다.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회원이자 <고려대학교 연극 100년사> 집필위원 양윤석(영어영문학과 78학번) 교우는 “당시 연극이라는 매체가 민족계몽 운동과 항일구국운동의 성격을 지닌 청년문화 운동의 한 방편이었다는 사실을 ‘동원령’의 존재가 증명한다”고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동원령’의 자세한 대본은 전해지지 않지만, 그 주제의식과 정신만큼은 수차례 재해석과 각색을 거쳐 현재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2020년 11월, 성북구는 소파 방정환을 기념하는 온라인 어린이연극 ‘죽었니 살았니’를 유튜브에 공개했다. ‘죽었니 살았니’는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가 주최, 고려대 안암동 캠퍼스타운 지원센터, 성북문화원이 주관했다. 또 고려대 극예술연구회 동우회가 후원했으며, 극단 ‘공놀이클럽’이 제작했다. 공놀이클럽 대표 강훈구(정치외교학과 09학번) 씨는 “방정환 선생의 뜻을 이어받아 어린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연극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전해져 내려오는 ‘동원령’의 기본 설정을 바탕으로, 강 대표는 연극의 극본을 현대의 상황에 알맞게 각색했다. 병든 아내를 어린이 ‘서우’로, 일제강점기를 현재의 팬데믹 상황으로 대치했다. 부모님이 일을 나간 사이, 학교도 놀이터도 갈 수 없는 서우에게 손님들이 찾아온다. 방역사, 배달기사, 코로나 바이러스, 동화책 방문판매업자, 친구 수현이가 차례로 문을 두드린다. 서우는 고민 끝에 이들을 집 안으로 들인 뒤, 고민을 함께 나누며 희망을 되찾는다. 강훈구 대표는“코로나 이후 집에 홀로 남는 어린이들이 이 연극을 통해 조금이나마 웃음을 되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어린이는 민족을 이끌어갈 새로운 세대

  ‘어린이’라는 표현은 1920년 8월 발행된 월간지 <개벽>에 기고한 방정환의 글 ‘어린이 노래: 불켜는 이’에서 처음으로 등장했다. 그는 ‘애녀석’, ‘아해놈’처럼 아이들을 낮춰 부르던 기존 용어를 없애고, 소년을 공경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려고 노력했다. 이만영(본교·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는“‘어린이’라는 단어를 창안하는 그 자체로써 그들을 ‘늙은이’, ‘젊은이’와 대등한 지위에 올려놓았다”고 전했다.

  이만영 교수는 방정환 선생이 아동존중을 강조한 이유로 ‘천도교적 정신의 발현’을 꼽았다. 천도교는 평등의 가치를 기반으로 하는 사상이다. 이만영 교수는 “동학의 제2대 교주 최시형이 ‘어린이를 한울님같이 존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며 “방정환 선생 역시 천도교적 맥락에서 ‘짓밟히고, 학대받고, 쓸쓸하게 자라는 어린 혼을 구원하자’고 외친 것”이라 전했다.

  방정환은 나라와 민족의 장래가 어린이에게 달렸다고 믿었다. “우리는 겉으로는 소년 문제를 연구하는 단체처럼 보이게 꾸밈으로써 일본인들의 경계를 피했지만, 실제로는 어린이들에게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배양해 주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방 선생과 함께 색동회를 조직한 절친 진장섭의 회고에서도 알 수 있듯, 방 선생은 어린이를 한 민족의 미래를 이끌어갈 주체로 바라봤다. 이만영 교수는 “방 선생은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기존 봉건적 사고관으로부터의 탈피를 주장했고, 그러한 실천적 주체로 어린이를 호명했던 것”이라 전했다.

어린이 운동을 전개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문화운동단체 '색동회'.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방정환 선생이다.
어린이 운동을 전개한 한국 최초의 어린이문화운동단체 '색동회'.
아랫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방정환 선생이다.

 

아동운동과 아동문학, 소파의 어린이 사랑

  천도교의 평등사상과 민족운동의 정신을 바탕으로, 방정환 선생은 아동운동의 활성화와 아동문학의 발전에 힘썼다. 도요대학 철학과에서 아동예술학과 아동심리학을 연구한 그는, 귀국 후 1921년 천도교소년회를 만들어 본격적인 어린이 운동에 뛰어들었다. 이기훈(연세대 사학과) 교수는 “방정환은 최초로 아이를 권리의 주체인 어린이로 표상하고, 아동존중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려고 했던 지식인”이라며 “어린이 권리 보호를 위한 사회적 계몽도 강조했지만, 어린이 스스로 참여하는 공간으로서 소년회를 조직하도록 하는 데 주력했다”고 덧붙였다.

  1923년, 방 선생은 어린이 운동 단체 ‘색동회’를 창립하고 천도교소년회 기관잡지 <어린이>를 창간했다. 월간 <어린이>에는 어린이들의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글이 실렸다. 일제 검열에 의해 해당 글이 삭제되거나 잡지가 압수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잡지 <어린이>는 1925년 10만 부 판매를 달성했다. 당시의 서울 인구수 30만 명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판매량이다.

  한국 아동문학사적으로도 방정환 선생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염희경 한국방정환재단 연구부장은 “소년운동가의 명성에 가려진 그의 아동문학가로서의 모습도 주목해야 한다”며 방 선생의 삶과 문학을 강조했다. 그는 외국동화 번역과 번안, 옛이야기 재화, 동화 창작 등 아이들이 즐기는 문학에 관한 활동이라면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이름 ‘방정환’ 대신 ‘깔깔박사’, ‘몽중인’등, 잡지마다 다른 필명으로 문학작품을 썼다. 염희경 부장은 “당시 일제의 검열을 효과적으로 피하고, 지면을 채우기에 부족한 필자 수를 보충하기 위해 방 선생은 15개가 넘는 필명을 사용했다”고 전했다.

  방정환은 타고난 이야기꾼이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매년 70회, 통산 1000회 이상 동화 구연을 했다. 외국동화는 방정환의 손에서 번역, 번안돼 우리나라에 소개됐다. 직접동화를 창작하기도 했는데, 특히 그가 쓴 아동탐정소설 <칠칠단의 비밀>에는 민족주의와 현실주의적 지향이 강하게 드러난다. 염희경 부장은 방 선생의 소설에 대해 “강한 현실성과 계몽성에 기반하는 한국 근대 아동문학의 특수성을 보여주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세상을 떠나기 직전, 선생은 “검정말 이끄는 검정마차를 가지고 검정 옷 입은 마부가 데리러 왔으니 나는 가봐야겠다”고 말하며 눈을 감았다고 전해진다. 동화 같은 삶을 살았던 그의 인생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어른들에게 어린이를 존중할 것을 꾸준히 부탁했다. 1923년 5월 1일 제1회 어린이날 기념식 ‘어린이날 선언’에서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써 달라고 당부했다. 염희경 부장은 “사회의 약자를 진정으로 해방하는 일이 궁극적으로는 강자까지도 해방하는 것”이라며 “시대와 사회의 약자였던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자 노력한 방 선생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우리가 ‘어린이’라는 존재를 어떤 태도로 대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논의가 뜨거운 요즘이다. 그 해답은 이미 오래전에 나왔다. 100년 전 방정환이 남긴 발자취가 그것이다.

방정환 선생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이다.
방정환 선생의 소년 시절과 청년 시절의 모습이다.

 

글|이다연 기자 idayeoni@

사진제공|독립기념관, 소명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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