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야경·느와르 영화의 기억

20세기에는 무역과 금융 중심지

중국 개입으로 자유 잃어가

 

  홍콩은 지난 한 세기 동안 동양과 서양 문화가 교차하며 제3의 지대를 형성해왔다.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자유롭고, 이데올로기를 강요하지 않아 개인의 자유를 기반으로 무한한 상상력을 보장했다. 영국 식민지하에서 고유한 정체성을 형성했던 홍콩은 중국 반환 이후 서서히 그 색채를 잃어갔다. 위기를 맞은 것은 경제와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작년 7월 1일 국가보안법이 시행되고 1년이 지난 현재, 홍콩 사회는 얼어붙었다.

 

한국인이 사랑했던 홍콩 영화

  “영웅본색에 나온 주윤발을 따라 이쑤시개를 많이 물고 다녔어요.” 유길용(남·50) 씨는 청소년 시절 자주 봤던 홍콩 영화를 떠올렸다. 8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은 화려한 액션과 권선징악 스토리로 구성된 홍콩영화에 열광했다. 김희영(남·50) 씨는 “아직도 중학생 때 봤던 주성치와 성룡이 나오는 홍콩 영화를 종종 다시 본다”고 말했다. 80년대에는 TV를 틀면 홍콩 배우들이 한국 광고나 쇼 프로그램에 위화감 없이 등장했다. 주윤발과 장국영이 우리나라 음료수, 초콜릿 광고에 나오던 시절이었다. 김승구(세종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홍콩 영화는 관객들이 재미있게 볼 수 있는 요소에 유교적 윤리관을 더해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며 “예를 들어 영웅본색에서 이야기하는 친구와 형제간 의리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상기시켰다”고 말했다.

  1970~80년대 홍콩영화산업은 자유로운 공간에서 무궁한 발전이 이루어진 산물이었다. 서구 수준의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홍콩에 중국과 대만의 영화 인력이 모여들었다.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이다 보니 표준 중국어 영화와 광둥어 영화가 경쟁하는 등 시간이 걸렸지만, 결국 광둥어로 통합되며 홍콩영화라는 제3의 문화 정체성이 확립됐다. 김승구 교수는 “홍콩에서는 어떤 영화도 부담없이 만들 수 있다는 신뢰가 퍼져있었다”며 “그 시절 홍콩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에 뒤지지 않는 기술력을 지니고 전통과 혁신을 결합했다”고 말했다.

 

자유로움에 기반한 홍콩 경제

  홍콩은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이자 금융 허브다. 발달한 산업 도시의 화려한 야경은 감탄을 자아낸다. “홍콩의 야경은 하늘에 있는 별을 따다가 건물에 박아놓은 것 같았어요.” 2017년 홍콩을 여행했던 이정현(문과대 사회19) 씨의 기억 속 홍콩은 야경이 아름다운 도시로 남아있다. 10여 년 전 홍콩에 다녀온 한서현(전북대 영교19) 씨도 홍콩을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있는 곳으로 기억한다. “관광객들로 그 당시 홍콩 거리거리가 붐볐었죠.” 화려하고 동서양이 혼합된 독특한 분위기가 매력인 홍콩은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관광지 중 하나다.

  홍콩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자유항으로서 상품과 외환의 진·출입이 활발했다. 홍콩에 자유무역항이 형성될 수 있었던 이유는 영국령 홍콩 당시 자리 잡은 비개입주의 경제 덕분이었다. 강준영(한국외대 국제 지역대학원) 교수는 “영국은 홍콩에 자유 경제 체제를 도입해 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고 했다. 1949년 중국 본토의 공산화는 자본과 기술이 홍콩으로 흡수되는 계기가 됐다. 강준영 교수는 “주로 상해 일대의 방직업자들이 자본과 기술을 가지고 홍콩으로 들어왔다”고 전했다. 중국이 1979년 개혁 개방 정책을 펼친 이후에 홍콩은 중국 투자의 중심지로서 큰 역할을 했다. 영국의 금융 시스템을 그대로 따르는 홍콩은 뉴욕, 런던과 더불어 3대 금융 시장으로 자리 잡아 동방의 진주로 불렸다.

 

중국 반환으로 산업이 흔들리다

  영국의 식민지배 아래 자유로움을 보장받던 홍콩은 1997년 중국 반환 이후 서서히 자유를 잃었다. 80년대 번성했던 홍콩 영화계는 90년대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단기간에 흥행작을 중심으로 한 다수의 모방 작품이 쏟아져 나와 혁신적 면모를 잃었다. 서서히 기울던 홍콩 영화계는 1997년 홍콩의 중국 반환을 기점으로 급격히 쇠락했다. 홍콩으로 몰리던 전 세계의 영화 자본들이 철수했고, 영화 인력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자유로움이 담보되지 않자 홍콩 영화는 자율성을 잃은 채 중국 시장에 포섭됐다. “규제가 더 엄격해졌으므로 우리의 기억 속 홍콩 영화는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김승구 교수는 말했다.

  홍콩의 경제 또한 크게 흔들렸다. 자유경제 체제 기반의 홍콩에서 활동하던 많은 기업은 중국 공산당의 개입을 우려해 홍콩을 빠져나갔다. 류영하(백석대 중국어학과) 교수는 “1997년 이후로 기업들 사이에서는 홍콩을 떠나는 것이 지속적인 이슈였다”며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정부가 민간 업체에 대한 정보를 요구할 수 있게 되면서 이런 경향이 심화됐다”고 말했다. 중국은 금융과 무역 중 심지 역할을 하던 홍콩의 대안으로 선전과 하이난을 경제특구로 지정해 발전시키고 있다. 강준영 교수는 “과거 대중국 무역 전체의 관문이었던 홍콩은 광동성의 관문으로 그 역할이 축소됐다”고 전했다. 실제로 중국 전체 경제 규모에서 30%에 육박하던 홍콩의 비중은 2%로 상당히 감소했다.

  미국이 홍콩 국가보안법 제정에 대한 보복으로 홍콩의 특별지위를 박탈한 것은 또 하나의 쟁점이다. 미국은 작년 7월 중국 본토와 달리 홍콩에 대해 보장하던 관세, 투자, 무역, 비자 발급에 대한 특별대우를 철회했다.

2019년,홍콩 타이포 지역의 시민들은 홍콩 민주화 연대 문구를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레넌 월을 만들었다.
2019년 홍콩 송환법 반대시위에는 노인들까지 거리로 나왔다.

 

국가보안법, 시민사회를 억압하다

2020년 발표된 국가보안법은 홍콩의 옛 모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중국 중앙정부는 홍콩 자치가 불완전하다는 이유로 홍콩 정부의 동의를 얻지 않고 전인대에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이렇게 통과된 법은 국가 분열 행위, 국가 정권 전복 행위, 테러단체 조직 등에 대해 범위를 모호하게 명시했다. 강 교수는 “적게는 5년 이하의 징역에서 많게는 무기징역까지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중국, 홍콩 정부에 저항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시위가 금지됐고, 발표 다음 날부터 많은 사람이 체포됐다. 올해 6월에는 홍콩에서 판매 부수 1위였던 빈과일보가 폐간됐다. 류영하 교수는 “빈과일보는 홍콩 내에서 반중의 목소리를 가장 크게 냈던 신문”이라며 “빈과일보의 사주가 미국, 유럽의 지도자들까지 만나며 홍콩 연대를 외쳤기 때문에 폐간은 예정된 결과”라고 말했다. 현재 빈과일보의 사주는 국가보안법 중 외세와의 결탁 혐의로 체포됐고, 반국가세력이기 때문에 재산이 동결됐다. 9만 5000명이 속해있는 홍콩 최대 규모의 교사 노조도 지도부를 체포하겠다는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8월에 해산선언을 했다. 그동안 시위를 진두지휘하던 민간인권전선도 전부 해산했다.

  홍콩 정부의 인구통계에 따르면, 국가보안법이 시행된 작년 7월부터 올해 6월까지 1 년새 8만 9200명이 홍콩을 떠났다. 이런 현상은 ‘헥시트(HK exit)’로 불린다. 홍콩을 떠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민 신청 자격이 주어지는 영국해외시민(BNO) 여권을 발급 받아 영국으로 향한다. 지난 2~3월 홍콩인들의 영국 이민 비자 신청은 이전 6개월간 신청 건수의 5배인 3만 4300건이었다.

  2017년부터 현재까지 홍콩에서 거주하고 있는 A씨는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와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홍콩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처음 홍콩에 갔던 2017년 홍콩은 중국 관할에 있다고 해도 인터넷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점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도시였다.” 평화로워 보이던 홍콩은 2019년 송환법 반대 시위로 아수라장이 됐다. A씨는 대자보나 포스터가 거리 곳곳에 붙어있고 친중 불매로 건물들의 유리창이 깨져있는 건 예삿일이었다며 그 당시 홍콩을 회상했다.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가 최루탄이 터진 장면을 마주하기도 했다. 이런 혼란은 국가보안법 시행 이후 완전히 사라졌다. “최근 홍콩은 시위가 언제 있었냐는 듯이 조용해졌어요.” 그는 말했다.

  1997년 중국에 반환되던 시절에 기대했던 홍콩의 모습과 지금의 홍콩 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져 있다.

 

글│유승하·조은진 기자 press@

사진│고대신문DB

사진출처|네이버 영화

사진제공│강준영(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교수, 장정아(인천대 중어중국학과)교수, 강은교(자전 정외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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