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경 문과대 교수·사회학과

 

  부임하고 처음으로 신입생들과 마주하는 날이었다. 대학에 첫걸음을 내딛는 사회학과 학생들에게 산술적으로, 혹은 학점의 평균이 가지는 수학적 가치로 대학의 경험을 축소시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노파심 어린 잔소리를 전했다. 더불어 필자는 학부시절 C를 받은 수업들을 통해서 대학시절 가장 중요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굳이 그 수업들이 사회학 전공 수업이었다는 사실까지 솔직하게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세미나를 마치고 스스로 반문했다. 옥에 티 없는 화려한 성적표를 기대했을 학생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학생들이 감사하다며 연락을 해왔다.

  필자의 실패담이 학생들에게 위로가 된 이유가 무엇일까. 아마도 이는 보이는 데이터 이면이 한결같지는 않아도 된다는 것을 발견한 것에서 오는 안도였을 게다. 화려한 스펙을 가진 선배라는 해시태그 넘어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하던, 결이 다른 데이터가 그들에게 용기를 주었을 터이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빙산의 일각이다. 그 일각 이면의 데이터들은 방대하고, 혼란스럽고, 일관적이지 않으며, 종종 모순적이다.

  드러난 데이터가 반드시 중요한 데이터는 아니다. 쉬이 보이는 데이터가 타당한 대표성을 갖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정보 과잉 사회에서, 간편히 제공되는 정보를 의심하는 것은 필수적인 생존 전략이다. 관찰되는 점과 점 사이의 간극을 일관적인 상상력으로 채워 선을 그리고, 통일성 있는 구조로 투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회귀선이 다수의 삶의 얼개를 포착할지라도, 회귀선 위에서 생을 영위하는 인간은 없다.

  데이터는 영원불변의 절댓값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성적표의 C는 평점을 낮추는 불편한 오점일 수 있다. 재수강을 하지 않고 상흔처럼 안고 졸업했던 그 학점은 훗날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다. 자칫 필자의 지나친 솔직함이 낳은 실수로 남을 수 있었던 그날의 자기 고백은 학생들의 따뜻한 공명 덕분에 훈훈한 울림의 미담이 되었다. 데이터를 액면의 수치가 아닌 고유 의미로 대체해 나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진 힘이고, 우리에 의해 만들지는, 우리의 생이다.

  기록되는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역사를 이룰지라도, 기록되지 않는 절대다수의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이룬다. 온라인 공간에 연출되고 전시되는 순간은 우리 일상의 지극히 비일상적인 순간이다. 이력서에 남는 한 줄은 지난한 노력의 과정 속에 지극히 드문 성취의 찰나이다. 성공적인 경험을 요약한 데이터들이 담긴 이력서가 오늘의 필자를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도 미미하다. 현재의 이력서를 출력하면 그 단락과 단락 사이 누락된 과거의 많은 실패를 함께 본다. 단언컨대 그 실패의 응시는 쓰리지 않다. 다가올 실패에 대한 공포는 누군가를 두렵게 할 수 있어도, 지나온 실패는 우리를 단단하게 한다.

  나쁜 학점을, 실패를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물론 모든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실패도 그 자체로 끝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실패는 곧 시작이다. 그 실패를 통해 비극을 쓸 것인지, 아름다운 감동의 드라마를 그려 낼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마음껏 넘어져도 좋은 시절이 학생 시절이다. 함께 울어줄 벗이 있고, 당신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워줄 스승이 있는 이 공간, 이 시간.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안전한 한 걸음 한 걸음으로, 실패의 상처 없는 시간들을 보내고 졸업장을 얻는 것이 나쁘다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괜찮다, 말해주고 싶다.

  성공의 순간에만 충실한 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기가 발동하고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눈시울이 시린 그 순간에 우리는 충분히 살아 있다. 그만으로도 온전히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생의 순간이다. 넘어져 아픈 그 순간에 우리는 값진 교훈을 얻는다. 성장통 없이 자랄 수는 없다. 고통이 감지되는 순간, 우리는 묵묵히 그것을 아름다운 상처로 키워나갈 따름이다.

  학점은 학생의 아니, 그 어떤 척도도 인간의 가능성을 측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그대들도 학점으로 스스로를 재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대들의 미래가 오늘의 데이터의 값을 더욱 숭고한 고유 가치로 대체하는 항해이기를 기대한다. 학점이 감히 담을 수 없는 그대들이 되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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