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너머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독서의 계절이다. 가을 분위기에 홀려 ‘이번 주 안으로 완독해야지’ 되뇌어도 이 다짐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다. 독서를 방해하는 건 몰아치는 과제도, 다가오는 중간고사도 아닌 책의 무게다. “누워서 책 읽으면 눈 나빠진다”던 엄마의 말. 그 말이 무색하게도 어려서부터 자기 전 침대에 누워 책을 읽는 습관을 들였다. 천장으로 두 팔을 높이 쳐들고 있다 보면 이내 팔이 부들부들 떨려온다. 10분마다 왼쪽으로 누웠다, 엎드리기를 반복해 몸을 돌려가며 책을 읽는다. 어렵고 두꺼운 책일수록 그 내용보다는 무게감에 신경이 쏠린다.  

  내 인생 책은 빨강머리 앤의 원서 <Anne of green gables>이다. 초록색 표지에 예쁘게 그려진 일러스트. 두툼한 두께에도 막상 들어보면 가벼워 자주 손이 간다. 외국책 특유의 갱지와도 같은 질감을 선호하지 않는 독자들도 분명 있다. 그렇지만 ‘책의 본질은 읽는 것’이라는 내 철학에 페이퍼백은 완벽히 들어맞는다. 

  우리나라 책은 질이 좋다. 종이는 A4용지에 가까운 백색에 코팅까지 돼 여러 번 돌려 읽어도 해지지 않는다. 종이가 얼마나 하얀지를 따지는 백색도를 살펴보면 한국의 책은 미국, 일본 서적에 비해 20% 더 하얗다. 종이를 하얗고 두껍게 만들기 위해선 종이에 돌가루를 섞어야 한다. 외국 서적에 8%의 돌가루가 들어있을 때 한국 서적은 27%를 함량한다. 같은 문고본이라도 우리나라의 책이 곱절은 무거운 까닭이다. 두꺼운 흰 종이에 하드커버까지, 책이 무거워지는 이유는 소장가치와 상품성에 있다. “요즘에는 교과서도 이렇게 예쁘게 만드네!” 부모님은 동생의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고 감탄했다. 동생은 미련 없이 두꺼운 교과서를 제본소에 맡겨 책을 3등분했다. 눈이 즐겁더라도 손이 가지 않는다면 읽히는 책은 아닐 테다.

  태블릿으로 책을 읽고 목소리로 책을 듣는 시대. 종이책의 자리를 e-book이 차지해가는 시대. 종이책은 오랜 위기설에 시달리고 있다. 국내 출판업계는 책을 ‘예쁘게’가 아닌 ‘가볍게’ 만들려 하지 않았던 걸까. 무게로만 따지자면 나도 당연히 더 가벼운 저쪽으로 옮겨가야 하지만, 아직은 종이책의 감촉과 냄새를 포기하지 못한다. 그러니 조금만 가벼워졌으면 싶다.


장예림 기자 yell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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