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에서 ‘고려빛’ 인생을 이어 가다
카자흐스탄에서 ‘고려빛’ 인생을 이어 가다
  • 이원호 기자
  • 승인 2021.11.28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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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욱(국어국문학과 86학번) 고려문화원 원장 인터뷰

고대신문 경험으로 동포언론 운영

의병장의 후손과 특별한 인연도

“양국 잇는 다리 역할 하고파”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 근교 차른 캐년.
카자흐스탄의 옛 수도 알마티 근교 차른 캐년.

  카자흐스탄. 이름은 들어봤지만 익숙지 않은 나라다. 하지만 카자흐스탄에는 우리의 동포인 10만 고려인과 2500여명의 교민이 살고 있다. 아직도 카자흐스탄 곳곳에는 고려인의 흔적을 볼 수 있지만, 한국 내 고려인에 관한 관심은 저조한 편이다. 김상욱(국어국문학과 86학번) 교우는 고려인을 한국에 알리고 카자흐스탄과 한국의 연결다리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 한인일보를 통해 교민들의 소식을 한국에 전하고 있으며, 알마티 고려문화원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카자흐스탄에 알리고 있다. 먼 이국 카자흐스탄에서 묵묵히 한국을 알리고 있는 그를 만나봤다. 

 

샐롐(Сәлем)! 카자흐스탄

 고등학교 때 접한 월간잡지 ‘한국인’은 김상욱 원장의 국어국문학과 진학에 영향을 줬다. 당시 ‘한국인’에는 문화적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글과 유명한 작가들의 수필이 실려있었다. 인상 깊게 읽은 글들의 저자 약력란에는 하나같이 ‘국어국문학과 졸업’이 써있었다. 국문학과에 진학하면 그 저자들처럼 통찰력을 쌓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국문학과에 진학한 그는 당연히 학보사에 입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3월 말 고대신문 기자 모집 광고를 본 그는 바로 입사 시험에 응시했다. 3월에 입사한 김 원장은 사진기자로 학보사 생활을 시작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7년, 사진부장 직책을 맡아 민주화 열기를 사진으로 담으며 학부 시절을 보냈다.

  80년대의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나 ‘통일 운동’에 영향을 받은 김상욱 원장은 대학원에 진학해 북한학을 전공했다. 석사 학위를 취득한 이후 그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던 소련으로 유학을 떠나고자 했다. 소련 해체의 이유를 현지에 가서 직접 알아보고 싶었던 김 원장은 모스크바로 유학을 준비했다. 유학을 준비하던 중, 당시 카자흐스탄의 수도이던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 교수 모집 공고를 접했다. 당시 공산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지원자가 드물었다. 카자흐스탄 또한 구소련의 일부였기에 학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그는 카자흐스탄으로 떠났다.

  그는 카자흐스탄 국립아카데미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으로 돌아오려 계획했다. 박사 논문을 쓴 뒤, 그때 한국에서 IMF 금융위기가 터졌다. 학교와 회사가 모두 경기가 어려워져 그를 불러주는 곳이 없었다. “고민하던 중에 제자와 학과가 떠올랐어요. 제가 떠난 후의 학과가 걱정됐고, 학생들이랑 헤어지기도 원치 않았어요.” 

  카자흐스탄에서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소련 해체 이후 분리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가스나 전기 수급이 원활하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 가스가 끊기기도 했고, 일상생활 중 갑자기 정전돼 촛불을 켜기도 했다. 한국 음식이 그리울 때도 있었다. 하지만 김 원장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80년대에 학교 다닐 때와 카자흐스탄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니 크게 불편하지 않았어요. 고려인들 덕분에 두부나 콩나물, 된장 등 한국 음식도 먹을 수 있었고요.” 

 

“고대신문 출신이니 도와주게나”

  “조선어과 교수로 처음 갔을 때, 김창근 초대 대사님이 저를 부르셨어요. 그리곤 ‘고대신문 기자로 일했으니 고려일보 한글판 발행을 도와주게나’라고 말씀하셨어요.” 고려일보는 당시 알마티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이었다. 사회주의 국가는 언론사 운영 비용 모두를 국가에서 부담했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고려일보는 국가로부터 지원이 끊겼고, 월급을 받지 못한 고려일보 기자들은 한국 기업으로 이직하기 시작했다. “고려일보의 어려운 사정을 알고 난 뒤 힘들다는 핑계로 나올 수가 없었어요. 대사님이 저에게 말씀하셨을 때부터 고려일보 한글판 기자로 일할 운명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김상욱 원장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동시에 신문을 만들기 시작했다. 

  90년대 후반, 카자흐스탄 내 교민사회가 커지면서 한글 신문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졌다. 현지 카자흐스탄 정보를 궁금해하는 한국인과 한국 소식을 궁금해하는 현지인도 많아졌다. 고려인을 대상으로 발행된 고려일보로는 부족했다. 제자들이 졸업 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상황까지 겹치자 한글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1999년, 제자들과 함께 카자흐스탄 ‘한인일보’를 창립했다. 한국어를 배운 제자들이 현지 정보를 번역해 기사를 작성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카자흐스탄 내 주재원과 교민 수가 늘어나 신문사 일이 커지기 시작했다. 신문사와 대학 일을 모두 병행하기 어려워진 김상욱 원장은 학보사 기자 출신인 아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런데도 일이 너무 많아져, 그는 학교를 그만두고 신문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학교에 한국어과가 자리 잡은 상태였어요. 그리고 제자들에게 제가 학교의 자리를 양보해주는 것이 맞을 거라 생각했어요. 그렇게 신문사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김상욱 원장은 알마티국립대학교 조선어과에서 강의를 진행했었다.

 

의병장의 후손을 돕다

  구한말 의병장 민긍호의 후손들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많이 거주하고 있다. 어느 날, 언론사 사무실로 민 알렉산드라 할머니가 찾아와 통곡했다. 김상욱 원장이 이유를 묻자, 할머니는 ‘한국 정부에서 사실을 입증할만한 자료가 부족해 민긍호의 친손녀로 인정해주지 않는다’고 답했다. “할머님의 할머니께서 자신을 데리고 일본군을 피해 급히 만주를 거쳐서 연해주로 피신했는데 서류를 챙길 겨를이 어딨겠어요. 그렇게 몇 년 동안 불가하다는 답변을 듣고 우리 사무실로 찾아오셨죠.” 그는 당시 공 관장과 함께 모든 유품을 다 가져와 선별해서 보훈처에 공문과 함께 보냈다. 2년 동안 서류를 보내고 보완하는 작업을 거쳐 민 알렉산드라 할머니는 독립유공자 민긍호의 후손으로 인정받았다.

  김 원장은 3년 전 불의의 사고로 요절한 데니스 텐 선수와 인터뷰를 했던 일도 기억에 남는 일로 꼽았다. 데니스 텐 선수는 민긍호의 후손으로 소치 동계올림픽 남자 피겨 동메달리스트다. “어린 데니스를 보고 미래에 피겨 스타가 될 것이라고 제가 한국에 처음 소개했어요.” 대회 참가를 위해 한국에 방문한 데니스 선수를 인터뷰할 기회가 찾아왔다. 데니스 선수는 호주머니에 돌을 넣고 왔다. “제가 무슨 돌이냐고 물어봤어요. 데니스는 ‘원주에 있는 할아버지(민긍호) 산소에서 주워온 돌이다. 시합 나가기 전에 돌을 만지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승리할 수 있게 할아버지께 빈다’고 말했어요. 그런 인터뷰를 하고 한국에 전할 수 있었던 것이 기억에 남아요.”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가 있던 '카라한 성묘'를 방문했을 때, 이슬람 성직자에게 빵을 선물받는 모습이다.
고선지 장군의 탈라스 전투가 있던 '카라한 성묘'를 방문했을 때, 이슬람 성직자에게 빵을 선물받는 모습이다.

 

참새 방앗간에서 고려문화원으로

  김상욱 원장은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연결다리 역할도 수행해 왔다. 한국 기업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카자흐스탄 현지 정보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하지만 당시에는 인터넷 환경이 좋지 않았다. 현지 정보를 원하는 교민들은 신문사 사무실로 모이기 시작했다. 교민들은 궁금한 일이 생기거나 부당한 일을 호소해야 할 때 신문사 사무실에 찾아왔다. “신문사 사무실은 교민들에게는 ‘참새 방앗간’이었어요.” 결국 신문사 부설로 카자흐스탄 정보 센터(KIC)를 열었다. 현지 정보를 번역해 필요한 사람들에게 1년간 무료로 제공했다.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하는 그의 바람은 결국 컨설팅 기업 ‘센트럴 아시아 마케팅 (CAM)’ 창업으로까지 이어졌다. 김 원장은 대표를 맡아 한국 기업이 중앙아시아에 진출하는 일을 돕고 있다.

 카자흐스탄에는 130여 개의 소수민족이 있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소수민족을 관리하기 위해 공간을 제공하고 협회를 스스로 만들게 했다. 고려인들 역시 공간을 받아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카자흐스탄 정부가 더 협소한 공간으로 옮기게 조치했다. “옮긴 이후 공간이 줄어들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구나 북, 한국어 교재와 같은 짐을 둘 공간도 없어졌어요. 춤과 노래 연습이 끝나고 차를 마시고 수다도 떨기도 했는데, 빠르게 비워줘야 해서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마침 김 원장 소유의 건물에 짐을 보관하던 남는 공간이 있었다. 처음에는 고려인들이 모여서 차를 마시고 수다를 나눌 수 있는 ‘고려사랑방’으로 개방했다. 이후 고려인 문화단체들도 모여서 노래와 춤 연습도 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무료 한국어 교실’과 같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지며 문화원으로 발전했다. 2016년, 고려사랑방으로 시작한 커뮤니티는 ‘고려문화원’으로 탈바꿈해 개관했다. “지금은 고려인들이 모여서 합창단과 같은 모임의 공간이나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은 현지인이 정보를 얻는 공간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또 제가 한국어 선생이라 한국어 교육 기능도 문화원에서 담당하고 있어요.” 

  김상욱 원장이 이루고 싶은 작은 소원은 고려인들에게 막걸리를 부활시키는 것이다. 27년 전, 잃어버린 우리의 말을 찾기 위해 고려인 동포들과 모국어 재생 사업을 한 그는, 이제 잃어버린 우리의 맛을 찾아줄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고려인들은 쌀로 만든 막걸리 맛을 잃어버렸어요. 우리 선조들이 농사짓고 즐겨 마시던 막걸리를 고려인들에게 다시 알게 해주고, 전파하고 싶어요. ‘고려막걸리’라고 이미 이름도 만들어뒀어요.”

  “제 친구가 농담으로 ‘너한테 고려라는 이름이 따라다니는 것 같다’고 말한 적 있어요. 고려대학교에 입학해서, 고대신문사를 하고, 카자흐스탄에 와서 고려일보까지 했으니깐요. 대사님께서 고려일보 제안을 하셨을 때 안 했으면 어땠을까 싶어요.” 그는 자신의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저는 고려인과 카자흐스탄을 매우 사랑해요. 지금까지 한국과 카자흐스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해왔다고 생각하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어요.”

 

고려인 설날 대잔치 때, 김상욱 원장이 고려인 동포로부터 전통베개를 선물받고 있다.
고려인 설날 대잔치 때, 김상욱 원장이 고려인 동포로부터 전통베개를 선물받고 있다.

 

글 | 이원호 기자 onelike@

사진제공 | 김상욱 고려문화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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