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미군장갑차에 의해 비명에 간 효순양과 미선양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시작돼 전국민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촛불집회가 대통력 탄핵이라는 시국을 맞아 광화문에서 다시 타오르고 있다.

먼저 그곳에서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의 면면을 보자. 고사리 손을 앙증맞게 흔드는 꼬맹이를 목마 태우고 있는 아빠, 녹초가 돼 퇴근 한 아내의 손을 이끌고 성남에서 달려 온 젊은 남편,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주역의 한축으로 불리웠던 이른바 넥타이부대, 데이트를 겸해 나왔다는 젊은 커플 등 한결 같이 평화로운 모습을 한 얼굴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현 시국에 대한 자신들의 의견을 담아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축제의 한마당을 연출하고 있다. 그런데 경찰은 이 축제의 한마당을 야간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는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이하, 집시법) 제10조를 들어 이것을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단속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처럼 사회의 중요한 사안이 발생했을 때, 시민이 자발적으로 모여 자신의 의사를 표시하고 확인하는 평화적인 집회를 갖는 것을 보고, 필자는 한국사회의 변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통합시스템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느꼈다. 이번 촛불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단속에 나서겠다는 경찰의 대응은 바로 이러한 변화를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근대국가는 국가와 시민사이의 교환관계를 전제로 해 성립했다. 따라서 양자 사이에는 끊임없이 소통이 이뤄져야 한다. 만약 이 교환관계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일방적이 된다던가 또는 아예 양쪽 모두가 단절 되는 경우, 양자사이의 긴장관계는 높아지고 이윽고 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형식으로 표출되게 된다. 1789년에 발생한 프랑스 대혁명은 바로 이러한 현상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사회의 교환관계는 어떠했는가? 누구나 다 예상하듯이 해방이후의 한국사회에서의 이 교환관계는 원활하지 못했다. 즉, 시민에서 국가로의 의사전달이 거의 단절되고 국가로부터 시민에의 일방적인 소통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국가쪽은 나름대로의 논리가 있었다. 즉, 제2차대전 이후의 냉전이라는 국제정치경제질서와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과 대치하는 상황에서 각양각색의 의견을 들어서는 국가가 일사불란하게 정책을 세워서 집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국가의 시민에 대한 인식은 시민이란 수준이 낮은 집단이라는 것 그리고 시민에 대한 불신이다.

심지어 1988년 9월 1일 설치되어 종전의 사법부보다는 비교적 진보적인 결정을 내놓아 주목을 받고 있는 헌법재판소조차 아직 이 같은 인식에서 완전히 탈피하고 있지 못하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집시법 제10조에 대한 결정문의 일부를 보자. ‘일반적으로 야간의 옥외집회·시위는 주간의 옥외집회·시위보다 질서유지가 어렵고 따라서 그만큼 공공의 안녕질서에 해를끼칠 개연성이 높으며, 심리학적으로도 야간에는 주간보다 자극에 민감하고 흥분하기 쉬워서 집회 및 시위가 본래의 목적과 궤도를 이탈하여 난폭화할 우려가 있고, 또 불순세력의 개입이 용이하며 이를 단속하기가 어려운 점 등 여러 가지의 특성이 있다’는 것이다.

꼬맹이를 목에 태우고 있는 아빠가 궤도를 이탈하여 난폭화하고, 지친 몸을 이끌고 온 퇴근길의 직장인을 불순세력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자원봉사단을 구성해 행사장 주변에 인간 가이드라인을 치고 일반시민의 불편을 최소화하는 등 질서유지에 만전을 기하고 있는 집회를 왜 단속의 대상으로 보아야 하는지?

이제 국가가 교환관계의 일방통행의 논리로 삼았던 요소도 이제 거의 사라졌다. 그 뿐만이 아니다. 국가는 입만 열면 국제화를 외치고 시장경제의 논리를 강조하고 있다. 교환관계의 복원이야 말로 국제화와 시장경제로 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작업이다. 그런데 근대국가에서 국가와 시민사이의 의사소통은 원래 국가의 여러 장치를 통하여 복합적으로 이뤄진다.

이를 위해서 국회는 시민의 의사를 제대로 읽어서 입법과 행정부의 감시에 힘쓰고, 사법부는 시대의 흐름에 맞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행정부는 시민의 참여를 전제로 한 행정을 펼쳐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촛불집회라는 ‘광장’은 이러한 국가의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과정에서 국가와 시민의 교환관계를 복원하려는 과도기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유진식(경희대 교수, 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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