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의 제작 기간과 8백 시간 분량의 촬영 테이프 등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송환>은 관객의 관심권 바깥으로 송환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이자 독립영화라는 악조건, 비전향 장기수라는 무거운 소재에도 불구하고 이 ‘블록버스터 독립영화’는 떳떳이 선전 중이다. 독립영화계의 대부인 김동원 감독의 카메라는 12년 동안 비전향 장기수들과 함께 어울렸고, 그 어울림에서 우러나온 감정들을 지금 우리에게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가슴 속에 이념적 갈등이 얼마나 악착같이 군림하고 있는지, 그 갈등 속에서 오늘날 우리는 ‘민족’을 어떻게 상상하고 있는지를 질문하면서 말이다.

<송환>이 진지한 영화관객들에게 토론거리가 되고 있음을 흐뭇해하면서 다른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된다. 작년 11월에 조용하게 극장에 올랐다가 단명해 버린 홍기선 감독의 <선택>이다. <송환>이 늙그수레한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실제 모습을 만나는 작품이라면, <선택>은 그 중에서도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최장기수 김선명의 45년간 감옥살이를 재연한 극영화이다. 두 영화는 같은 소재를 다루었지만,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라는 서로 다른 접근법을 취한다. 공통점은 역사의 풍파와 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꿋꿋이 신념을 지키는 영혼들의 거대한 그늘과 꺼지지 않는 불빛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장기수들의 삶을 응시하는 방법과 세부적인 주목 사항은 서로 다르다. <송환>은 내레이터의 시선과 카메라의 위치, 카메라로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자의식이 묻어난다. 장기수 할아버지들의 신념과 아픔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것들에 대한 감독 자신의 태도이다. ‘진실’과 ‘사실’의 전달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라면 당연히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김동원 감독은 장기수들과의 만남과 이들에 대한 송환운동 과정 등을 묵묵히 따라가면서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드러낸다. 한국에서 반공 교육을 받았고 자유주의 이념을 수용하며 살아왔던 감독은 한때 ‘빨갱이’, ‘간첩’이라 불렸던 할아버지들을 아버지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면서 감독은 자신의 이중적인 입장을 부끄러워 한다. 자신이 과연 할아버지들에게 ‘아들과도 같다’는 고마움을 들을 만한 존재인지를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이것은 감독과 유사한 입장에 선 우리들 모두의 부끄러움이기도 하다.

<선택>은 <송환>에 비하면 좀 더 감정적이고 생생하다. 공감할 만한 극영화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선택>이 정서적인 동일화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자칫 우리는 선입견상 김선명을 올곧고 경직된 투사로 여길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선택>의 태도는 이보다 담백하면서도 처절하다. 자식뻘 되는 혈육의 원망을 들으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동료 장기수들의 처지는 김선명에게도 남의 일이 아니다. 그에게도 노모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번뇌가 가슴 아프게 느껴지는 이유기도 하다. 그만큼 지난 시대의 엄혹한 국가주의와 서슬 퍼런 폭력이 그를 억누른다. <선택>은 ‘선택’을 대가로 감수해야 했던 전율과 고통의 흔적들, 그 흔적들 속에서도 피어나는 해맑고 담백한 순수의 순간들을 담담하게 극화한다. 혹시 보지 못했다면 비디오가게를 찾아보길 바란다. 물론 <송환>을 극장에서 본 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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