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학과 공산주의 연구의 대가

본교 재정난 극복과 국제화 앞장서

정치권 제안에도 학계를 지켜

독재 정권의 압박에도 학생 보호

 

  ‘가장 큰 스승’, ‘마지막 광복군’, ‘고려대의 영원한 총장’. 김준엽 전 총장을 수식하는 여러 별명이다. 그는 1949년 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1985년까지 36년간 본교에서 재직했다. 교수로서는 아세아문제연구소(현 아세아문제연구원, 아연) 설립과 중어중문학과, 노어노문학과 신설에 힘썼다. 총장 임기 중에는 교내 여러 건물을 완·착공하고 군사정권에 맞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퇴임 이후에도 학자의 길을 줄곧 걸었다. 김준엽 총장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그의 생애를 돌아봤다.

 

  학병 탈출과 광복군 생활

  김준엽 전 총장은 신의주 고중 졸업 후 일본 게이오대 동양사학과에 진학했다. 동양사 중에서도 특히 최근세사에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조선이 망한 이유와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이유를 알기 위해서였다.

  1943년 여름, 일본군이 조선인 대학생들도 학병으로 징집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김 총장은 학병에 입대한 후 탈출해 독립군 임시정부로 가기로 마음 먹는다. 그는 저서 <장정>에서 “학병으로 나갔다가 탈출하여 내가 동경하는 우리나라 독립군에 가담하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고 회상했다.

  김 총장은 나침반, 지도, 손목시계와 칼 등을 숨긴 채 일본군에 입대했다. 중국 전선으로 보내진 그는 그믐날인 1944년 3월 29일 새벽에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탈출이 발각되더라도 방향을 틀리게 쫓아오도록 거짓 쪽지도 남겼다. 새벽 2시, 성을 넘어 해자로 내려갈 때 흙이 무너져 물소리가 났다. “누구냐!(誰か!)” 김 총장은 전속력으로 뛰었다. 학병탈출 1호였다.

  작은 나침반에 의지해 지도를 보고 무작정 걸어갔다. 한 마을에서 중국군에 붙잡히고 말자 조선 독립을 위해 탈출해 온 조선인임을 사실대로 밝혔다. 알고 보니 이들은 위장한 국부군계의 유격대였다. 김준엽 전 총장은 유격대에 4개월 간 머물며 여러 작전을 펼쳤다. 유격대에서 만난 조선인 출신 학병 4명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까지 장정(長征)을 펼친다. 장사꾼으로 변장하기도 하고 벙어리 시늉을 하기도 했다. 김 총장은 1945년 1월 31일 일본군을 탈출한 지 10개월 만에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한다. 한국광복군에 합류해 이범석 장군의 부관으로 부임한다. CIA의 전신인 미국전략정보기관 OSS와 합작해 계획한 국내진공작전 공작원으로 선정돼 특수훈련을 받기도 했다. 1945년 8월 20일 펼쳐질 예정이었던 이 작전은 일제의 무조건 항복으로 무산됐다.

 

독립운동을 하던 당시의 김준엽 전 총장(좌). 그는 ‘마지막 광복군’이란 별명으로도 불린다.

 

  학자의 길을 선택하다

  해방 이후 임시정부 요인과 광복군은 귀국길에 올랐다. 김구 주석과 이범석 장군 등은 김준엽 전 총장에게 새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힘을 합치자 제안했다. 청년 김준엽의 고민은 <장정>에 잘 드러난다. “정계에 투신해 벼슬길에 오를 것인가? 아니면 학자의 길을 택할 것인가? 나는 이 두 가지 갈림길을 놓고 무척이나 고민하였다.”

  민족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온 힘을 다했던 김 총장은 건국사업이 전개되는 마당에서는 정치뿐만 아니라 학계를 이끌 사람 역시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전쟁 중 중국어를 배우고, 게이오대에서 중국사를 공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중국 전문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이때의 나의 선택은 일생을 지배하였다. 고대에서 정년퇴임 할 때까지 40년간 이때의 결심을 조금도 동요됨이 없이 지켜내려 왔고 수차의 벼슬 유혹이 있었으나 아무 거리낌 없이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국가발전에서 나의 역할에 대한 소신이 확고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김 총장은 1946년 2월 중국 국립 동방어문전문학교에 한국어과가 신설돼 전임강사로 취직했다. 중국 대학에 입학해 졸업하려던 김준엽 전 총장의 기존 계획과는 다소 어긋났지만 좋은 기회였기에 김 총장은 자리를 수락했다. 강의를 하며 밤낮으로 중국어와 중국사를 공부했다. 학생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동방어문전문학교가 충칭에서 난징으로 옮겨오자 김 총장은 국립중앙대학 대학원에 입학해 본격적인 연구 생활을 시작했다.

 

  고려대와의 인연이 시작되다

  1949년 2월, 김준엽 전 총장은 동방어전문학교에서의 교수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한 후, 같은 해 9월 고려대 부교수로 부임했다. 그는 이후 33년간 본교에서 교수 생활을 하게 된다. 총장 3년을 포함하면 36년을 보낸 것이다.

  김준엽 전 총장은 교수 시절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 창설에 기여했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아세아문제연구소는 내가 일생에 가장 심혈을 기울였고 또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는 일 가운데 하나”라고 밝혔다. 특히 1962년 포드재단으로부터 28만5000달러를 지원받아 자체적인 건물을 세우고 학술지를 발행했다. 하버드대 객원교수로 있을 때 연이 닿은 덕분이었다. 김 총장은 아연에서 수많은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해 외국의 저명한 학자들을 고려대로 초대하기도 했다. 이내영(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당시에는 한국은 몰라도 아연은 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아연의 위상이 높았다”고 회상했다.

  중어중문학과와 노어노문학과를 신설하는 데도 힘썼다. 김준엽 전 총장은 문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문화의 교류가 중요함을 평소 강조했다. 1962년부터 문교부(현 교육부)에 학과 신설을 신청했고, 1972년 마침내 중어중문학과가 신설됐다. 2년 후인 1974년엔 노어노문학과가 생겼다. 중국학연구회(현 중국학연구소)를 창립해 초대 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상우 문과대학장은 “문과대학이 동아시아 연구 교육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김준엽 선생님이 만든 기반 덕분”이라고 전했다.

  김준엽 전 총장은 광복군 시절의 동지 장준하가 창간한 시사잡지 <사상계>의 주간을 맡기도 했다. 1961년, 1962년, 1974년 세 차례 유엔 총회에 한국 대표로도 참석했다. 1972년엔 대한적십자사 자문위원으로 평양에 방문했다. 공산주의와 북한 연구의 선구자였기에 박정희 정부에서 민주공화당 사무총장,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직을 제의했으나 거절했다.

 

저서 을 집필하던 당시의 김준엽 총장. 제자들은 그를 ‘가장 큰 스승’으로 칭한다.
저서 <장정>을 집필하던 당시의 김준엽 총장. 제자들은 그를 ‘가장 큰 스승’으로 칭한다.

 

  ‘큰 거지’ 김준엽

  1982년 김준엽 총장은 국무총리 취임으로 총장직을 사퇴한 김상협 총장의 뒤를 이어 고려대 제9대 총장에 취임한다. 당시 본교는 재정난 외에도 크고 작은 여러 문제에 처해있었다. 그는 <장정>에서 당시 학교 운영상의 문제로 △재정 문제 △재단 문제 △교우회와의 관계 △시설 부족 △재산관리 문제 △직원 문제 △행정기구 문제 △제규정의 정리 문제 △무계획성의 문제 △대우 개선 문제 △총장의 자세 문제를 꼽았다.

  김준엽 총장이 부임했을 당시 고려대는 약 60억 원의 빚을 지고 있었다. 김 총장은 전체 교수의회에서 2년 반 안에 모든 빚을 청산하고 재정을 정상화하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우선 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사무처가 예산의 편성과 집행을 모두 담당하던 기존의 구조를 개편했다. 예산 편성은 기획처가 맡고 사무처의 집행을 기획처가 감독하게 됐다. 경리과는 총무처에서 관장하도록 해 예산 편성과 집행을 분리했다. 또한 일정액 이상의 지출은 반드시 기획처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했다. 2년 이내에 빚을 완전히 청산할 수 있도록 예산안을 새로 편성했다.

  절약에도 주력했다. 김준엽 총장이 솔선수범해 총장실의 장부를 비서실장이 기록하고 월말마다 총무처장이 감사하도록 했다. 또한 교직원의 회식비를 절약하도록 했다. 연간 회식비가 4억 원이 넘는 상황이었다. 회식할 땐 꼭 사유서를 적게 했으며 2차, 3차는 금지했다. 교수들의 비난에도 방침을 고수한 지 2년이 지나자 회식비가 반 이상 줄었다. 8억 원에 달하던 연간 에너지 비용도 에너지관리위원회를 신설해 20% 이상 절약했다. 물품구매나 시공에서의 입찰도 투명하게 했다.

  시설 확충을 위한 모금에도 힘썼다. 김준엽 총장은 아연 시절 본인을 ‘작은 거지’, 총장 시절 본인을 ‘큰 거지’로 농담 삼아 소개했을 만큼 수많은 지원금을 얻어냈다. 취임 직후 교우회와 협력해 재단 이사와 대기업 회장을 수차례 만났다. 그는 과학도서관 완공과 교사 신축에 필요한 100억 원을 3개월 만에 받아냈다.

  이후에도 각 단과대학이 골고루 혜택을 볼 수 있도록 여러 차례 모금 활동을 펼쳤다. 김준엽 총장 임기 당시 과학도서관, 법학관, 정경관 등 새로운 건물을 구축했다. 고대의료원을 발족해 산하에 혜화병원, 구로병원, 여주병원, 반월병원을 두도록 했다. 김준엽 총장은 <장정>에서 “개교 이래 77년 간 역대 총장이 지은 총건평(4만7696평)의 반에 해당하는 2만3019평을 재직 2년 8개월 내에 완성한 것을 자랑으로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이외에도 ‘과학고대’를 내세우며 공과대학, 이과대학, 농과대학에 크게 투자해 인문계 위주의 학교라는 이미지를 탈피했다.

 

  굴복하지 않는 총장

  김준엽 총장은 독재정권에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웠다. 그는 총장에 취임하자마자 아내에게 “절대로 굴욕적인 총장은 할 수 없다. 대학의 권위를 지켜야 함은 물론이고 고대의 명예와 일생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럴 수가 없다. 총장이라는 자리에 연연해서 정부에 아부하는 따위의 행동은 일체 배제하겠다”고 다짐했다.

  당시엔 사립대학에 대한 정부의 간섭이 심했다. 김준엽 총장은 <장정>에서 “사립대학에 대한 재정 지원은 한 푼도 없으면서 모든 것을 정부에서 통제했다. 총장의 임면에서부터 등록금책정, 예산편성, 교수들의 봉급, 학과 신설, 학생들의 자치활동, 대학신문, 고연전까지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고 회상했다. 김 총장은 취임하자마자 국가안전기획부나 경찰서 등에서 파견한 기관원 10여 명을 전부 쫓아냈다.

  외국인에게 명예박사 학위를 주라는 문교부의 지시도 거부했다. 당대엔 외국 정부의 귀빈이 방문하면 대학이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하곤 했다. 김준엽 전 총장은 고려대에서 세운 규준에 부합하지 않는 인물에게 학위를 줄 수는 없다며 취임 후 3개월 동안 3번이나 학위수여를 거절했다. 박정희 정권하에서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해직당한 교수 6인을 복직시키기도 했다.

  학생들을 지키는 데에도 힘썼다. 1984년 당시 총학생회장이었던 김영춘(영어영문학과 81학번) 교우는 김준엽 전 총장을 “온화한 학자셨지만 엄혹한 독재정치체제에서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제자들을 보호하는 일에는 물러서지 않고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셨던 분”으로 기억했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자 정부는 대학 총학생회를 없애고 ‘학도호국단’으로 대체했다. 본교와 서울대, 연세대 등은 대학자율화를 내세워 총학생회 부활을 추진했다. 학생들의 직선제로 본교에 4년 만에 총학생회가 들어섰지만,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총학생회장단에 대한 제적을 요구했다. 김영춘 교우는 “김준엽 선생님께서는 저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정부에 맞서 총학생회 인정을 주장하고 설득하는 일에 앞장서셨다”고 전했다. 본교 학생을 포함한 대학생 264명이 민정당 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을 때에도 김 총장은 학칙을 따르겠다며 학생들을 보호했다.

  학생을 제적하지 않은 김준엽 총장에게 정부는 사퇴 압박을 가했다. 재시험 실시, 선거운동 참여 등의 사유로 파면하려 했으나 큰 문제가 발견되지 않았다. 정부는 결국 교직원 자녀 특별입학을 문제 삼았다. 1984년 입시에 교직원 자녀 25명에게 특혜를 부여했다는 사유였다. 김 총장은 <장정>에서 “임기 동안엔 특혜입학을 없애고자 했으나 처장이 사임할 수밖에 없다고 간청해 20%를 가산하는 범위에서만 우대하도록 지시했다”고 밝혔다. 결국 김준엽 총장은 특혜 받은 학생 25명을 제적 처리하지 않는 조건으로 총장직에서 사퇴했다. 그는 “임기 4년 동안 달성해 내리라는 목표를 2년 반 동안 완성해 냈기에 언제 파면되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한편, 김준엽 총장이 사퇴한 다음 해인 1986년 교육개혁심의회는  당시 관행이었던 대학 교직원 자녀의 입학 특혜를 공식적으로 의결했다.

  김준엽 총장이 사퇴 의사를 밝히자 학생들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열었다. 1985년 2월 졸업식에서 시작된 시위는 3월 개학 이후까지 한 달이 넘게 진행됐다. 김 총장은 “총장 나가라는 학교는 많았어도 총장 나가지 말라는 시위는 이게 처음”이라며 평생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이상우 학장은 “총장의 퇴진을 학생들이 이렇게 가슴 아파한 일은 없었다”며 “한국 대학 역사에서 가장 가슴 뭉클한 장면”이라 회상했다.

 

1985년 2월 졸업식. 김준엽 총장은 이후 총장직을 사퇴한다. 제자들은 이날을 ‘눈물의 졸업식’으로 기억한다.
1985년 2월 졸업식. 김준엽 총장은 이후 총장직을 사퇴한다. 제자들은 이날을 ‘눈물의 졸업식’으로 기억한다.
김준엽 총장의 사퇴 이후 학생들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열었다. 시위는 졸업식 날부터 1달 넘게 이어졌다.
김준엽 총장의 사퇴 이후 학생들은 총장 퇴진 반대 시위를 열었다. 시위는 졸업식 날부터 1달 넘게 이어졌다.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

  총장 사퇴 후 교수 정년까지 6개월이 남은 김준엽 총장은 평교수로 학교에 남았다. 총장직에서 내려온 후에 평교수로 남는 전례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학교 관계자는 김 총장의 출근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기관원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본인이 만든 아연 연구실에서도 쫓겨났다. 9월 진행된 정년 교수들의 은퇴식에 김 총장은 참석하지 않았다.

  학교를 떠난 김준엽 전 총장은 1988년 재단법인 사회과학원을 설립했다. <계간 사상>을 발간하고 후학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연구와 집필 활동도 놓지 않았다. 당시 사회과학원 연구위원으로 있었고, 현재 사회과학원장을 맡고 있는 이내영 교수는 “젊은 학자들을 키우고 챙기시던 품이 넓으신 분”이라 평가했다. 북경대를 비롯한 중국 10여 개 대학에 한국학과와 한국 연구소를 설립하는 데에 기여하기도 했다.

  김준엽 전 총장은 여러 차례의 입각 제의를 전부 거절했다. 특히 국무총리직 제의에 “고려대학교 총장이 총리보다 높은 자리인데, 어떻게 총장을 하다가 총리가 되나”라고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내영 교수는 “김준엽 선생님께서는 무교셨지만 항상 ‘역사의 신’을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인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역사로 본인이 어떻게 기록되는지를 의식하며 권력에 대한 유혹을 절제하고 정도의 길을 걸으신 게 아닐까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김준엽 전 총장은 제자들에게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고 가르쳤다. 김준엽 총장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본인의 가르침처럼 역사에 살아 숨쉬며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글 | 조형준 기자 jun@

사진제공 | 아세아문제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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