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한 문화공간센터 대표
          최정한 문화공간센터 대표

 

  과거를 미래로 이끄는 힘은 기억이다. 백남준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날 자꾸 서양에서 다 배운 사람인 줄 아는데 사실 인생을 결정지은 사상이나 예술의 바탕은 이미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에 모두 흡수한 거거든.” 5살부터 18살까지 살았던 창신동과 동대문, 종로. 그곳의 풍경에 대한 기억들은 그의 작품세계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가 돼 돌아온 그는 지구본을 가득 실은 지게를 지고 창신동을 거닐었다. 이 퍼포먼스를 통해 그가 활동했던 뉴욕 소호, 베를린 등 세계와 창신동이 하나로 연결됐음을 보여준다. 기억은 장소와 그것을 둘러싼 도시로부터 형성된다. 이를 장소성이라 부른다. 장소성은 죽은 박제가 아니라, 현존하는 우리와 다음 세대들에 의해 다시 의미가 부여되며 쌓이는 살아있는 미래다.

  서울시는 이런 장소성을 가성비가 없다며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삼았다. 투입 예산 대비 성과가 없는 문화기관을 보고하라는 시정 지침에 따라 서울시립미술관은 백남준기념관 등 3개 기관을 보고한 건데. 오 시장 취임 이후 작품, 콘텐츠, 프로그램 업데이트와 투자도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다. 20여 년간 막대한 예산으로 미디어시티 서울 비엔날레를 주관한 미술관이 다른 시설도 아닌 백남준기념관을 없애려하다니. 미술관을 오히려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여론이 들끓으면서 백남준기념관을 그냥 두기로 했으니 불행 중 다행이라 안도해야 할까.

  백남준기념관은 서울에 있고 이름의 무게로 살아남았지만 원주 아카데미극장은 무너졌다. 그동안 시민들은 고공농성까지 불사하며 민주적 시민여론 조사에 근거한 의견수렴과 대화를 촉구해왔다. 그러나 원주시는 아카데미극장을 지키려는 시민활동가 체포, 벽면 철거, 대화거부로 응수했다. 논리는 단 하나. 시민 세금을 들여 재생할 이유가 없다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였다.

  1963년 개관한 아카데미극장은 원형이 보존된 가장 오래된 단관극장으로 평가받는다. 군사도시에서 혁신도시로 발전해 온 원주는 특히나 삶의 이야기가 켜켜이 쌓인 기억의 공간이 많지 않다. 그렇기에 아카데미극장은 지켜야 할 시민문화유산이자 기억의 저장고다.

  본디 원주시는 미온적이었지만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으고 활동하는 과정을 보면서 극장 재생을 수용해 극장을 매입했다. 일련의 과정 자체가 이미 시민들에 의해 극장이 살아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이제 시는 눈에 보이는 극장의 겉과 속을 솜씨 있게 만지면서 기록, 기억들의 아카이빙과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를 테이블에 올려놓기만 하면 될 일. 그런데 신임시장은 전임시장의 사업들을 구조조정하겠다면서 철거를 결정한 것이다. 그 자리에 주차장과 야외공연장을 짓겠다고 한다. 어린아이를 씻긴 후 물만 버리지 않고 아이까지 같이 버리는 꼴이다.

  백남준기념관과 원주 아카데미극장,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다. 그러나 둘의 본질이 다를 바 있을까. 삶의 원풍경을 담은 장소성을 구조조정의 대상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도시가 아닌 도시의 삶을 개발하자는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의 15분 도시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도시가 가진 휴먼스케일과 장소성은 오래된 건물과 길, 그곳의 사람들이 축적해온 삶의 이야기로부터 생성된다.

  문체부도 서울시도 유휴공간 재생 정책이나 골목길 보존, 한양도성 복원 등 막대한 공적 예산을 투입해왔다. 정부는 최근 생활권 단위의 로컬브랜드 지원을 강화하고 지역의 특성화 사업을 권장유도하고 있다. 차제에 장소성이 생활권과 로컬브랜드에 중요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유휴공간 문화재생의 평가지표 중 하나로 포함하는 것도 급한 대로 방편은 될성싶다.

  영화 ‘시네마천국’에서 영사기사 알프레도는 검열로 잘라낸 필름들을 보고 싶어 하는 어린 토토에게 말한다. “토토, 이것은 분명 네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보관하고 있다가 나중에 때가 되면 돌려주마.” 우리는 무엇을 보관하고 있는가.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돌려줄 것인가.

 

최정한 문화공간센터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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