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PD 꿈꾸다 예능국으로

관찰하는 습관 연출에 녹여내

나만의 목소리 담아내고파

 

류호진 PD는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나를 알아가는 탐험을 계속하고 싶다”고 전했다.
류호진 PD는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나를 알아가는 탐험을 계속하고 싶다”고 전했다.

 

  <12> 시즌1에서 출연진에게 몰래카메라를 호되게 당했던 신입 PD5년 만에 시즌3 메인 PD가 됐다. 시청률 위기에 빠진 <12>은 류호진(신문방송학과 98학번) PD의 활약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12>의 성공 이후로도 <최고의 한방>, <서울촌놈>, <어쩌다사장> 등을 연출했다. ‘우리네 인생은 결국 좋든 싫든 탐험하며 사는 것이라는 그의 철학은 그가 흥행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연출한 비결이다.

 

고등학교 때 싹튼 방송국 로망

  “2학년 때 학교 방송부원이던 친구가 축제를 보러 오라고 해서 갔어요. 사람들이 열광하는 쇼가 너무 재밌어 보였어요. 그런데 내가 남 앞에 나서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대신 그 쇼 뒤에서 일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고려대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한 이유도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성적에 맞춰서 간 거였어요. 담임 선생님께서 너는 공부를 게을리하는 아이니까 경영, 행정 이런 데 가면 안 된다. 신방과로 가라하셔서 하고 들어왔어요.”

  부산에서 막 상경한 류 PD에게 입학 후 첫 2주는 고역이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소극적인 학생이 응원 OT, 합동응원전, 개강총회에 적응하기는 어려웠다. 새내기 류호진에게 응원 문화는 전체주의적, 집단주의적이었다. “응원을 왜 외워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되게 웃겨요. 그냥 놀면 되지.”

  학교에 정을 붙일 기회는 입학 둘째 주 마지막 날 찾아왔다. 수원 친구를 데리고 학교 구경을 하던 중 홍보관 앞 고대방송국 국원 모집포스터를 보고 고등학교 때 했던 다짐이 떠올랐다. “포스터 밑에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쓰여있어서 그 자리에서 원서를 썼어요. 포스터 옆에 앉아있던 기자 선배가 PD 쓰면 떨어져라고 해서 보도부를 지원했죠.”

  교육방송국(KUBS) 보도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축제가 열리는 5월이랑 9월엔 집에 못 가고 열흘씩 밤새고 그랬어요.” 매일같이 기거하며 방송국은 그의 아지트가 됐다. “방송국에서 음악을 들으며 노는 게 재밌었어요. 고등학교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을 즐기기에도 바빴고요.” 방송국 생활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학업은 뒷전이었다. “2학년 2학기 때 학사경고를 받았어요. 제대하고 재수강 안 했으면 2점대로 졸업했을 거예요.”

 

교내방송국에서 잡지 기자까지

  2학년이 된 류호진 PD는 진로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했다. 그에겐 재밌는 일을 하고 싶지만, 정작 내가 재밌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고민도 있었다. 신문방송학도가 진출할 수 있는 분야를 하나씩 알아보고 무엇이 본인과 맞는지 실험하기로 했다.

  일단 기자는 제외했다. KUBS 생활을 하며 본인이 좋은 기자가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좋은 기자는 취재원이 말하고 싶지 않은 걸 말하게 하고, 그게 기사로 나왔을 때 취재원이 내가 말하길 잘했구나라고 느끼게끔 하는 기자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는 게 너무 싫었어요.” 그는 교내 JMS 동아리 취재를 나섰을 때 기자가 적성에 맞지 않음을 크게 느꼈다. “JMS가 평범한 종교 동아리로 위장해 있었는데, 학생들을 어딘가로 보낸다는 소문이 돌아 취재를 나섰죠. 동아리원을 붙잡고 ‘JMS 아니세요?’ 물으니까 아니라길래 하고 덮었어요.”

  보도부를 1년쯤 하다 보니 그는 자신에게 안 맞는 서클을 하고 있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하지만 좋아하는 글을 쓰며 몇 번씩 마음을 다잡았다. “취재하면서 사람 만나는 건 스트레스 받는 일이지만 적고 정리해서 결과물을 만드는 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PD4년간 KUBS에 몸담고 국장까지 한 뒤 입대했다.

  방송 직무를 희망했던 류 PD는 군대에서 대북방송 아나운서가 됐다. “무언가를 소리내서 읽는 걸 좋아해서 지원했는데 역시 재밌었어요. 장교들이 원고에 국군은 지금 먹을 게 너무 풍족해서 지금 처치가 곤란합니다’, ‘무제한으로 제공된 맥주에 모두 기쁨을 느꼈습니다라 써놓으면 그걸 녹음해서 송출해요. 전방 청취를 갔는데 근무를 서던 병사가 아저씨, 왜 거짓말해요?’라고 따진 적이 있어요. 그래서 위에서 쓴다고 해명했던 기억이 나요.” 하지만 TV 아나운서는 얼굴이 잘생겨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직업으로 삼는 것은 포기했다.

  글쓰는 게 좋았던 그는 제대 후 패션 매거진 마리끌레르의 기자로 일했다. 스트레이트 기사를 쓰는 기자와 콘텐츠를 만드는 PD의 중간 성격을 가진 잡지 기자는 그의 적성에 맞았다. “아이템을 뽑아서 취재하고, 사진작가와 스타일리스트의 일정을 잡고,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재미를 느꼈어요.” 그러나 잡지보다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는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PD 시험을 준비했다.

 

<12> 심폐소생 신화

  어릴 적부터 음악을 좋아했던 류호진 PD는 음악 교양 PD를 꿈꿨다. “집에 턴테이블이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클래식, 재즈, 장르 상관없이 다양한 음악을 들으셨죠. 아버지의 세계가 궁금해서 한 곡 두 곡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악이 좋아졌어요.” 하지만 교양 PD로 지원한 방송국에는 전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지원한 예능 PD 직군은 1301의 경쟁률을 뚫고 단번에 붙었다.

  입사 후에는 예능국으로 발령받았다. 그것도 당시 전성기에 있던 <12>이었다. 그는 신입 PD로서 혹독한 신고식을 당했다. “강호동 씨에게 들어 올려졌을 때는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나중에 , 이거 좀 심한데싶었지만, 그땐 이미 늦었죠.”

  입사 후 첫 반년은 자신이 프로그램과 맞지 않는 사람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음 1년 반은 하려면 할 수 있지만 이게 과연 즐거울 것인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하루 버티다 보니 그것도 한때였다. “지나고 보니까 즐거웠던 것 같아요. 버라이어티에 맞는 사람은 아닌 건데, 안 맞는 일도 오랫동안 하다 보면 그냥 요령이 생겨요. 요령으로 버티는 거죠.” 음악국으로 가게 된 건 입사하고 5년 차 때였다. <뮤직뱅크>1년 동안 잠깐 했지만, 그의 생각과는 조금 달랐다. “싫진 않았어요. 하지만 뮤직뱅크는 엄밀히 말하면 음악 프로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춤과 세트 미술이 주인 눈으로 보는 프로그램인 거죠.”

  이후 회사의 결정에 따라 <12> 시즌3 메인 PD를 맡았다. 시즌1의 영광과 시즌2의 쇠락이라는 부담을 안고 시작한 시즌3은 성공적이었다. 기억나는 특집으로는 금연 특집을 꼽았다. “그냥 멤버들을 괴롭히고 싶었어요. 담배를 못 피우게 하니까 짜증 내는 게 너무 웃겼어요. 출연자 중에 금연 성공한 사람 지금 한 명도 없어요.” PD는 프로그램 제작에서 의사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예능은 재촬영이 안 되고 자연적으로 벌어지는 게 전부이기 때문에 타이밍이 중요해요. 의사소통이 어려워지면 그 타이밍을 놓치기 쉬워요.” 그는 출연진과의 의사소통을 위해 계곡물에 직접 들어가 보고, 까나리도 마셔보는 등 역지사지로 생각해 보려 노력했다.

  <12>을 마친 후 류 PD는 드라마 <최고의 한방>도 제작했고 tvN으로 이적했다. 다소 생뚱맞은 결정에 그의 의지가 온전히 반영된 것은 아니었다. “개인의 뚜렷한 야망이나 취향이 없었기 때문에 다양한 걸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거 해봐, 저거 해봐하면 하고 맡았죠.”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이지만, 그는 그것을 탐험이라고 말했다. “꼭 세계 여행 이런 것만이 아니라 나에게 버거운 활동도 해보는 것도 탐험이에요.” 하지만 모순되게도 겁이 많은 그는 뭔가를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대신 준비를 더 많이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러면 흥행을 떠나서 뭔가 배우는 건 반드시 있어요.” 드라마를 통해서 그는 조금 더 멋있게 찍는 촬영 기술을 배웠다. tvN에서는 원하던 음악 교양 프로그램을 만들 기회도 생겼다.

 

류호진 PD의 연애학개론

  ‘연애를 시작하면 한 사람의 취향과 지식, 그리고 많은 것이 함께 온다.’ 2013년 서른셋의 그가 페이스북에 작성한 연애에 관한 글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PD는 해당 글에 30대의 연애 경험을 녹였다. “20대 중반까지는 물적,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자기 자신을 알기에는 부족해요. 에너지가 표출되는 시기는 20대 후반에 한 번 와요. 어떤 사람은 안 하던 캠핑을 해보고, 어떤 사람은 첫 해외여행을 가보기도 하고. 저는 일이 너무 바빠서 그런 에너지가 유예돼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만나는 사람들은 자기만의 취향을 발견했던 상태였죠.”

  글에서 얻은 깨달음은 그의 사람 관찰 습관 덕분이었다. “대학교 때부터 기자 생활을 거쳐 방송국까지 이 사람 무슨 생각하지?’ ‘이 사람 뭐가 웃기지?’ 하며 사람을 관찰하는 게 습관이 된 지 오래였죠.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할 기회가 없었지만, 내가 만나는 상대방을 관찰하며 그 사람 뒤에 있는 특성, 취향, 습관, 처지 이런 게 자연스럽게 보였어요. 상대방이 나를 맛집에 데려가면 그냥 평범한 남자친구들처럼 맛있네하고 지나가는 사람은 아니었죠. 얘는 왜 이걸 좋아하지? 어떻게 이걸 알게 됐지? 걔가 이렇게 살아왔으니까 이랬구나, 생각하는 경험이 누적되며 그런 글을 쓰게 된 것 같아요.”

  류호진 PD는 사람을 관찰하는 습관이 PD로서 장단점이 모두 존재한다고 말했다. “저는 사람을 들여다보면 쉽게 재미를 느껴요. 누구나 재미있는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근데 대중들은 되게 재밌어야 재밌다고 생각할 수 있잖아요. 그 간극을 좁혀서 제가 느끼는 재미를 대중들에게도 전하고 싶어요.”

  결혼에 대한 호기심도 언급했다.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면 대체로 결혼, 출산, 육아 과정에서 자기가 전혀 몰랐던 세계를 알게 되더라고요. 내가 성장하고, 내 아이를 성장시키고, 내가 죽는 것. 인생에 세 개의 사이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저는 아직 PD로 일하면서 3분의 1까지밖에 인생의 외연을 확장하지 못했어요. 탐험을 계속 이어가면서 내가 누군지 알아가고 인생을 완성하고 싶어요.”

 

내용을 가진 PD가 되세요

  그는 후배 PD들에게 실력을 기르고 싶다면 책을 많이 읽고 글을 많이 쓰라고 조언한다. “영상미만 신경 쓰는 사람은 처음에 몇 년 반짝 잘할 수 있을지 몰라도 오래가지 못해요. 영상도 이야기기 때문에 글을 남기는 게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는 PD를 꿈꾼다면 내용을 정하는 게 먼저라고 말한다. “‘나는 어떠한 내용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라고 구체적으로 정해야 해요. ‘막연히 방송국에 들어가서 뭐든 해보고 싶습니다는 옛날 말이에요.”

  류호진 PD에게도 그 내용은 아직 빈칸으로 남겨져 있다. “저도 2, 3년 안에는 나만의 목소리를 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그는 언젠가 사람들이 얽혀 있는 것에 대한 흥미를 바탕으로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싶다며 눈을 반짝였다. “세상 사람들이 다양한 일을 하면서 분업하는 게 매일 신기해요. 대학교 때 선과 현대라는 수업에서 인간은 관계를 맺음으로써 존재한다고 배웠는데,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나와 세계 자체도 관계 맺고 있기에 절대 나 혼자 존재할 순 없거든요.”

 

| 추수연 기자 harvest@

사진 | 염가은 사진부장 7rr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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