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일 이과대 교수·물리학과
           이정일 이과대 교수·물리학과

 

  큰 사람일수록 실현 가능한 꿈을 가지고, 갈수록 꿈을 키우며, 못난 사람일수록 애초에 허황된 꿈을 꾸다가, 시간이 갈수록 움츠러든다. 내가 부임한 2004년 졸업반이었던 한 학생은 학자의 꿈을 키웠으나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해서 꿈을 접어야만 한다고 했다. 나는 호되게 그를 꾸짖으며 꿈을 버리지 말라고 했고 머뭇거리던 학생은 이내 MIT, 영화 오펜하이머 때문에 알려진 Los Alamos National Lab 등에서 승승장구하며 지금은 해외 명문대에서 교수로 교육과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결국 그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서 이룬 일이나 선생님의 조그마한 조언은 때로는 커다란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꿈을 키우고 실현해 왔는가? 우리는 41년 전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썼던 외국의 물리 교과서를 아직도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손으로 쓴 물리 교과서가 있으면 좋겠다는 꿈을 꾸었다.

  이를 위한 모든 작업은 순수한 자원봉사로 수행했으며 교내 또는 정부로부터 연구개발에 대한 지원은 전무했다. 모든 교재를 영어로 썼고 연습문제와 해설 동영상은 유튜브에 무료로 공개했다. 우리는 이 봉사단을 KPOPE(The Korea Pragmatist Organization for Physics Education)이라고 부른다. 

  국내 처음으로 2014년 과학도서관 대강당에서 300여명이 수강한 핵심교양 ‘E=mc²'에서 페이퍼리스 강의를 구현하고 출결 및 성적처리를 모두 블랙보드 상에서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네트워크 및 무선통신 중계기가 태부족이었던 당시 조교 조성웅, 김유래 학생과 함께 핸드폰으로 테더링을 제공하고 단말기가 없는 학생들에게 아이패드를 빌려주며 가까스로 운영했다. 코로나 직전 고려대학교의 교양물리실험 전 종목을 새로 개발하고 실험기구는 청계천으로 출근하며 직접 제작했고 실험리포트 종이를 없앴다. 시뮬레이션까지 가능한 실험분석이 엑셀로 구현되고 엑셀 전자 리포트를 제출하면 실험이 끝나는 자동화 시스템은 임재훈 박사의 공로로, 내가 아는 한 세계 최초로 성공시켰다. 마침 발발한 코로나 사태에 물리학과는 1주일도 미루지 않고 자연계 모든 학생에게 교양물리실험을 제공한 학과가 됐다. 모든 교재는 KPOPE Digital Library(kpope.org)에 무료로 공개했다.

  이러한 질적 변화는 양적 팽창을 야기한다. 하지만 또 다른 수준의 질적 변화가 동반되지 못하면 지속 가능하지 않다. 유튜브 생방송과 네이버 카페를 동원해 매 학기 학교에 의해 강제 삭제되는 교육자료를 피난시켰다. 1년 전엔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블랙보드 방송이 끊어졌고 150여명이 곧바로 수강을 취소했다. 지난 학기부터 블랙보드를 퀴즈스테이션으로 국한하고 원격교육센터의 박일정, 정채린 선생님의 도움으로 부모·자식 코스로 잘게 나눠 불안요소를 해결했다. 

  2024년 1학기 핵심교양 ‘과학적어리석음으로부터의탈출’을 수강한 3300명의 학생들은 한 학기 동안 770만개의 선택지가 무작위로 섞인 문항을 풀며 24시간 KPOPE 네이버카페에 질문하고 오랫동안 축적된 교육 정보를 얻는다.

  KPOPE 교재로 공부한 후학 중 걸출한 인재가 나와 KPOPE 명맥을 잇고 100년 후에도 살아남는 교과서로 만들기 바란다. 하지만 KPOPE의 꿈은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KPOPE의 기둥인 조성웅, 임재훈 박사는 자동화시스템 구현을 도맡아 하고 있으나 학교의 지원규정은 없다. 타교 조교보다 모자란 봉급에 시름하다 이직한 교양물리실 초빙교수의 공석을 메꾸기 위해 임무에도 없는 교양물리실 업무까지 봉사하고 있는 실정이다. 두 박사는 아쉽게도 이번 가을 고려대학교를 떠나야 할 상황이고 KPOPE 대형강의도 함께 그만해야 할 현실이 내 앞에 버티고 있다.

  KPOPE의 시도를 지속 가능하게 할 또 다른 차원의 질적 변화가 절실한 시점이다.

 

이정일 이과대 교수·물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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