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긍원 과기대 교수·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부
이긍원 과기대 교수·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부

 

  고대에서 ‘선생님’이 된 지 30년이 됐다. 고대 물 먹어 본 적 없던 나를 위해 원로 교수님께서 정성껏 신임교수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셨다. 고대만의 전통이라며 아름다운 고대어(高大語)를 알려주셨다. ‘대학’ 대신 ‘학교’라 했으며, ‘동문, 동창’ 같이 그저 그런 표현 대신 ‘교우’라는 정감 어린 말을 썼다. 특히 ‘교수님’이 아니라 ‘선생님’이라 부른다고 배웠다. 물론 상식 있고 뼈대 있는 사람은 ‘고연전’이란 우아한 말을 써야 한다는 건 고대에 오기 전부터 진즉 알고 있었다. 나도 그 정도는 안다.

  고대어는 용어만 다른 게 아니라 쓰임새도 달랐다. 교수, 강사, 직원 모두 서로를 선생님으로 통칭한다. 총장님도 선생님이다. 학교 안 모든 분을 똑같이 선생님으로 모시고 다니다 보니 금세 선생님이 입에 붙었다. 교수님이라 불리던 타 대학 교수님들도 내가 부르는 ‘선생님’이란 호칭을 거부하지 않았다. 고대에 시집가서 고대문화에 잘 젖어 들고 있다고 보시는 듯했다. 아니, 대학 시절 은사님들은 오히려 선생님이라 부르는 나를 더 살갑게 대해 주셨다.

  말이 사람을 바꾼다 했던가. 교수라 불리면 왠지 전문가가 돼 전문성을 전달해야 할 것 같아 긴장했고, 선생님이라 불리면 일단 옷깃부터 바로잡고 학생들 마음부터 살펴야 할 것 같았다. 젊은 나이에 선생님 소리를 들으니 어린 꼰대가 돼 열 살도 차이 나지 않는 학생을 지도하며 마음을 다했다. 선생님이다 보니 학생들은 ‘우리 아이들’이 됐고, 집에서는 내가 말하는 ‘우리 아이들’이 호적 메이트인지 학생인지 가끔 확인당하곤 했다. 대학에서 직원과 교원이 서로 데면데면할 수도 있지만 서로 선생님이라 모시다 보니 존중하는 마음이 클 수밖에 없다. 

  교우는 어떤가. 동창이나 동문이란 말보다 선후배 할 것 없이 모두가 우정으로 하나된 느낌이 있다. 학교에 기부하시는 분들을 뵐 기회가 많았다. 퇴직을 앞두고 씀씀이도 많이 줄여야 하는 원로 교수님의 따뜻한 기부도 있었고, 당신은 낡고 헤진 구두를 신고 오셔서 새 구두 몇천 벌을 살 수 있을 거액을 기부하신 교우도 있었다. ‘학교를 위해서…’ 그분들의 말씀에는 늘 ‘학교’가 있었다. ‘모교’가 있었다. 그저 고대는 우리에게 다른 그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the 학교’였던 것이다. 그뿐인가. 학회에 나갔더니 생면부지 선배 교우들이 교우 대접을 해 주셨다. 나도 형님 아우님 하며 녹아들었다. 수십 년 지난 후에 서울대에서 학부를 졸업한 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신 선배 교우는 안쓰러워하셨지만, 교우 대접은 여전하다. 고대의 문화는 참 정겹고 통이 크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고연전의 승리를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며 허리가 부서지라 응원해 본 사람과 그게 뭔지 모르는 사람. 난 다행히 늦게나마 전자가 됐다. 허리와 심장의 안녕을 위해 고연전 직관은 이젠 자제하지만. 학부생 시절에 이 가슴 뛰는 고연전의 환희를 경험해 봤다면 전생에 나라를 구한 거다. 그 특권이 너무 부럽다. 고연전 뒤풀이에서 학생은 총장 선생님께도 FM을 요청하고, 당신도 FM을 당연한 듯 즐겁게 해내시는 걸 보면 고대는 참 허물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곳이다.

  한국에서 제일 좋은 대학이 어디냐고 물어보는 외국 동료에게 나는 늘 고대라고 얘기하곤 했다. 고대만큼 울타리 넘어 들어온 사람들에게 열려 있는 곳이 없고, 그 안에서 살가운 정과 상호존중으로 엮어내는 문화를 가진 곳을 찾기 힘들다. 오죽하면 외국 유학생도 고대를 가장 선호할까.

  그래서 세종캠퍼스에서 30년간 근무하며 고대인이 된 것이 늘 자랑스러웠고 행복했다. 교수라서 그럴 수도 있고 내가 아둔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가끔 서울·세종캠퍼스 문제가 언론에 회자될 때마다 마음이 갑갑하다. 특히나 알량한 ‘입결’ 점수로 자격 운운하는 걸 보면 게시판에 글쓴이가 진짜 고대생이 맞나 눈을 의심하곤 했다. 고대인이 돼 고대만의 아름다운 고대어와 고대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면, 고대인의 포용력과 조화라는 고대정신도 함께 받아들였는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이긍원 과기대 교수·디스플레이·반도체물리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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