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감으로 사회운동 현장 기록

12년째 대중에게 독립영화 알려

“독립영화 통해 소통·공감하길”

 

김시천 소장은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하기도 하지만, 해야만 한다고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시천 소장은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일을 좋아하고 잘하기도 하지만, 해야만 한다고도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시천(농화학과 85학번) 서울영상위원회 독립영화공공배급망센터 소장은 12년째 서울 곳곳을 누비며 독립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김시천 소장은 자신이 독립영화와 관객의 매개자라고 말한다. “문화가 자리 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요. 저는 풀뿌리 작업을 하는 사람이고, 시민들이 독립영화를 보러 극장에 찾아간다면 독립영화는 비로소 피어날 겁니다.”

 

  카메라 든 학생 운동가

  김시천 소장은 초등학교 1학년 시절 부모님을 따라 처음 간 영화관에 마음을 뺏겼다. “스크린이 펼쳐진 어두운 상영관에서 다른 관객들과 함께 영화를 보며 울고 웃는 일이 재밌었어요.” 즐길 거리가 많지 않던 학창 시절 그에게는 팝송을 듣고 극장에 가는 일이 유일한 낙이었다. “라디오 두시의 데이트김광한의 팝스 다이얼에서 팝송을 듣고 극장에 가서 음악이 삽입된 영화를 봤어요. 음악이 좋으면 영화가 더 즐거워지고, 영화를 보고 나면 음악이 더 좋아지곤 했죠. 고등학생 땐 충무로 중앙극장에서 <사관과 신사>를 보고 OST였던 ‘Up Where We Belong’을 즐겨 들었어요.”

  김시천 소장은 1985년 고려대에 입학했다. 생명과학이 유망하단 이야길 듣고 농화학과에 진학했지만, 학교 안팎의 혼란으로 공부는 뒷전이었다. “어른들은 고려대가 데모 많이 하는 학교라며 다른 대학에 가길 권하셨어요. 아니나 다를까 입학식 날에도 학교에서 김준엽 총장 사퇴 반대 데모가 벌어졌죠. 저도 일주일에 몇 번씩 시위에 나가곤 했어요.

  전공 공부를 대신할 활동을 찾던 김시천 소장은 고려 중앙영화동아리 돌빛에 가입했다. 그는 1987년 돌빛 회장을 맡아 제1회 안암영화제를 열기도 했다. “‘해방의 영화를 창조하자는 돌빛 모토에 맞춰 첫해에는 <오발탄>, <영자의 전성시대>를 상영했어요.” 처음 여는 영화제였기에 김 소장은 비용 마련부터 필름 대여까지 전부 직접 도맡았다. “학교와 총학생회에 기획서를 내고 지원금을 받거나 팸플릿에 학교 앞 다방 광고를 실어 영화제 비용을 마련했어요. 비디오테이프도 없던 시절이라 유현목 감독님을 찾아가 <오발탄> 필름을 빌려 상영했죠. 화질이 낮아 좋은 관람 환경은 아니었지만 직접 고른 영화를 많은 학생 앞에서 상영한다는 게 뿌듯했어요.”

  김 소장은 1987년 총여학생회와 함께 교내에서 벌어진 여학생 폭행 사건을 다룬 영화 <왜 못마땅하죠?> 제작에도 참여했다. “벤치에서 담배를 피우던 여학생들이 한 남학생에게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해 큰 문제가 됐어요. 당시에 술 마시고 담배 피우는 여학생을 곱지 않게 보는 보수적인 남학생들이 있었죠.” 영화 제작이 처음이었던 그는 서투른 점이 많았다. “영화를 완성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요. 영화 제작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운 적이 없어 더 힘들었죠. 하지만 우리 학교에서 일어난 일인 만큼 학교 동아리에서 영화를 제작하는 게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시행착오 속에 서툴게 완성했지만 <왜 못마땅하죠?>는 학생들이 분노하게 만들기엔 충분한 영화였다. “시나리오 작성부터 연기, 촬영, 편집을 모두 우리 손으로 했기에 완벽한 영화는 아니었어요. 그래도 남성 우월주의에 대한 문제의식을 퍼뜨리는 계기가 돼 영화예술의 영향력을 실감하기도 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직접 만들었단 게 뿌듯하기도 했고요.” 그는 1987년 이한열 열사 영결식 당시 연세대 교정에서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행진하는 수십만 인파를 직접 카메라로 담기도 했다. “‘카메라를 든 우리가 이 시대를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있었어요. 여러 대학 동아리가 시위 현장을 열심히 촬영했죠. 기록물을 상영하며 그때를 되새기고 분노하며 결의를 다졌습니다.”

  그는 대학 생활을 영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뀐 중요한 시기였다고 평가했다. “대학 이전에는 영화가 꿈의 공장이었어요. 단순히 즐거워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영화관을 찾았죠. 대학생이 되고 영화가 오락을 넘어 메시지를 전하는 도구나 무기로까지 쓰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영화제서 만난 독립영화에 반해

  김시천 소장은 제대 후에도 영상을 계속 만들기 위해 1991년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사회단체 서울영상집단에 들어갔다. 그는 주로 노동운동, 학생 운동 등 사회운동 현장을 촬영했다. “최루탄이 빗발치는 현장에 방독면을 쓰고 나가서 영상을 촬영했어요. 돈을 벌긴커녕 회비를 내며 활동해야 했지만 민주화 운동 현장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일했죠. 절박하게 시위하는 학생들을 보며 그들의 모습을 기록하는 게 제 역할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사회단체 활동으로는 생계를 잇기 어려웠다. 김 소장은 생계와 영상이란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케이블TV 방송국에 PD로 입사했으나 오래 일하지 못하고 퇴사했다. “PD 일은 이전의 활동과는 결이 다르더군요. 스튜디오에서 토크 하는 모습을 찍고, 외주를 받아 홍보 영상을 제작하는 게 따분하고 재미없어 1년 반 만에 그만뒀어요.”

  김 소장은 퇴사 후 돌빛 시절 필름을 다뤄 본 경험을 살려 1997년 제1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기술팀장을 맡았다. “영화 필름을 검수하면서 가장 먼저 모든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한국에 국제영화제가 생긴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해외 영화를 들여와 상영하고 게스트를 초청해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일이 선구적이라고 느껴졌죠. 고되지만 새로운 영화 문화를 만드는 데 이바지한다는 자부심을 갖고 일했어요.” 당시엔 디지털 파일이 아닌 필름으로 영화를 상영했기에 기술팀장으로서 책임이 막중했다. “촘촘한 상영 시간표에 맞춰 이 상영관에서 저 상영관으로 필름을 옮기는 일을 총괄했어요. 수송 차량에 실린 필름이 안전하게 도착했는지도 확인해야 했죠. 필름 없이는 영화를 상영할 수 없으니 혹시라도 실수가 있을까 봐 마음이 늘 조마조마했어요.”

  첫 영화제엔 예상보다 많은 관객이 모여 상영관이 부족하기도 했다. “<킹덤> 1, 2부를 연달아 심야 상영하는데 이미 객석이 꽉 찼는데도 사람들이 극장에 끊임없이 몰려왔어요. 김홍준 당시 프로그래머가 한 번뿐인 상영을 위해 극장을 찾은 관객을 이대로 돌려보내지 말자고 해서 급하게 상영관을 하나 더 열었죠.” 그러나 필름은 하나뿐인 데다 복제할 수도 없었다. 김 소장은 직접 필름을 옮겨가며 두 개의 상영관을 총괄하기로 결정했다. “한 상영관에서 먼저 상영을 시작하고, 하나의 릴이 끝나면 바로 다른 상영관으로 필름을 옮겨 밤새 상영을 이어갔어요. 이런 일이 있을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일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는데, 관객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모두 영화를 볼 수 있도록 했단 게 정말 뿌듯했죠.” 첫 부천판타스틱국제영화제는 김 소장에게 평생 잊을 수 없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영화제 이후 김 소장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독립영화로 이어졌다. 작품성이 뛰어난 독립영화를 영화제에서만 접할 수 있는 현실이 아쉬웠기 때문이다. “흥행 가능성이 낮아서, 수입가가 비싸서, 메시지가 너무 강해서 등 여러 이유로 대중에 소개되지 못하는 영화가 많은 걸 알게 됐어요. 영화제는 제약이 해방된 장이지만 일 년에 열흘뿐이라는 점이 아쉬웠죠. 특히 상업영화보다 대중을 만날 기회가 적은 소규모 독립영화를 연중 소개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김시천 소장이 선택한 방법은 카페를 열어 방문객에게 독립영화를 소개하는 장소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김 소장은 2009년 일산시 정발산동에 카페 아몬드꽃나무를 열고 인디씨네클럽을 만들어 매주 독립영화를 상영하고 GV를 열었다. “독립영화가 시민에게 조금씩 스며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누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독립영화는 금방 말라붙을 것 같더라고요.” 김 소장의 카페는 지역 학생들과 독립영화가 만날 계기가 돼주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을 상영하고 안재훈 감독을 모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날 참석한 한 학생이 안재훈 감독에게 부탁해 그 학생의 학교에서 안 감독의 다른 작품 <소나기>를 상영했다고 하더라고요. 학생과 감독 사이 다리 역할을 하면서 더 많은 학생들에게 영화를 보여줄 기회를 만든 것이 보람찼어요.” 김 소장은 2017년까지 이 카페를 운영하며 독립영화가 시민들 마음 깊이 스며들 기회를 만들어냈다.

 

  독립영화와 관객을 연결하다

  김시천 소장이 서울영상위원회 독립영화공공배급망센터와 인연을 맺은 건 2014년 독립영화 공공상영회 인디서울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서울시 공공 문화 사업 좋은영화감상회가 2013년을 끝으로 폐지되고 인디서울이 마련되면서 김 소장에겐 인디서울의 총괄을 맡아 새 사업을 정착하고 발전시키는 임무가 주어졌다. “서울시가 독립영화 제작에 연간 수억을 지원해도 완성작이 언제 개봉했는지 모르게 사라지거나 개봉조차 못 하곤 했어요. 독립영화계는 서울시가 공공시설을 활용해 영화를 상영해 주길 원했고, 서울시도 예산을 들인 만큼 시민들이 결과물을 즐기길 바랐죠.” 김 소장도 독립영화를 상영할 기회가 더 필요하다는 취지에 공감했다.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는 자본의 논리를 따라 움직이기에 흥행성이 낮은 영화를 상영할 이유가 없어요.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독립영화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기회가 필요하기에 공공시설을 활용한 상영회가 좋은 기회가 될 거라 생각했죠.”

  김 소장은 도서관, 박물관 등 서울시 공공 문화 공간에서 시민들에게 독립영화를 무료로 상영하고 감독, 배우 등 관계자를 초대해 관객과의 대화도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상영작 또한 김시천 소장이 이끄는 센터가 직접 선정한다. “상영작은 개봉한 독립영화 중 시민이 즐겁게 볼만한 것, 생각할 거리를 제공하는 것으로 선정해요. 매달 최신작 위주로 다양한 주제를 포괄하는 데도 신경 써요.” 김 소장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순간은 고심해서 선정한 작품이 상영 취소될 때다. 2023년에는 세 곳의 도서관에서 <퀴어 마이 프렌즈> 상영이 취소되는 일도 있었다. “성소수자를 다루는 영화를 상영하면 상영관에 민원이 들어오곤 하죠. 시설 고유 사업이 아니니 센터는 상영을 강제할 수 없어요. 그 영화를 보고 싶지 않은 사람들에게 보라고 강제한 것도 아닌데, 다른 사람이 영화를 볼 기회마저 사라진 건 안타깝죠.”

  김 소장은 인디서울이 시민과 독립영화계 모두에 보탬이 되길 기대한다. “티켓값이 부담되는 시민도 부담 없이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무료 상영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상영 회차를 최대한 늘려 독립영화 배급사가 더 많은 수익을 얻을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습니다.” 그는 독립영화가 느리지만 꾸준히 성장해 사람들의 일상에 단단히 자리 잡길 소망한다. “관객이 눈에 띌 만큼 크게 늘지는 않더라도 매해 조금씩 늘길 바라며 준비하고 있어요. 내년이면 정년퇴직을 하는데, 그전까지 인디서울이 어떤 외압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업이 되도록 정착시키고 싶어요.”

 

  김시천 소장은 독립영화가 서로 존중하는 사회의 시작이 되리라 믿는다. “독립영화 중에는 소수자, 인권, 노동이나 근현대사를 다루며 강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작품이 많아요. 영화 속 현대사회의 문제의식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감상평을 나눠보세요. 함께 대화하다 보면 공감대를 쌓을 수 있을 거예요. 설령 다른 입장이라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방법을 깨닫길 바랍니다.”

 

글 | 황다희 기자 tender@

사진 | 이경원 기자 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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