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 어려워 대학 그만둬
66년 만에 철학 공부하러 복학
“손에서 책을 놓지 마세요”
올해 고려대 한문학과에 특별한 신입생이 입학했다. 66년 만에 대학으로 돌아온 87세 김효전 씨다. 1959년 경제적 어려움으로 대학을 중퇴한 그는 못다 이룬 학문의 꿈을 위해 고려대 한문학과 3학년으로 복학했다. “공자가 ‘배우고 그걸 때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말을 했죠. 저는 이 말처럼 그저 즐거워서 공부합니다. 제 이야기가 다른 학생들과 만학도들에게 힘이 되면 좋겠어요.”
서당에서 시작해 법대에서 멈춘 꿈
김효전 씨는 1937년 전남 장흥군의 바닷가 마을에서 11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말기,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가난한 시대였다. “그땐 초등학교도 ‘도쿠민 학교’라고 불렀어요. 소나무 껍질을 벗기면 나오는 물까지 빨아 먹던 시절이었죠. 저는 부유한 마을에서 대가족의 장남으로 태어나 다행히 굶지는 않았어요.” 그는 서당에 다니며 처음 한문을 배웠다. “6살부터 서당에서 <추구집>, <격몽요결>, <명심보감>, <소학>을 외웠어요. 어려서 무슨 뜻인지도 몰랐지만 외우지 못하면 종아리에 피가 나도록 맞으니 악착같이 외울 수밖에 없었죠. ‘하늘 천 따지 검을 현’을 외울 땐 파랗기만 한 하늘이 왜 검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는 서당의 엄격한 교육이 가치관의 뿌리가 됐다고 회상한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하잖아요. 한문 뜻은 몰라도 귀에 박히도록 배우니 윤리, 도덕, 충효가 몸에 뱄어요. 선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효전 씨의 어릴 적 꿈은 법조인이었다. 당시엔 사법시험에 합격해 관직에 오르는 것이 대표적인 성공의 길이었다. “판검사가 꿈이었던 건 자의 반, 타의 반이었어요. 그때는 농업과 상업을 천하게 보고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는 게 최고였거든요. 저도 개천에서 난 용이 되고 싶어 법조인을 꿈꿨죠.” 중고등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그는 1957년 우석학원 법학과에 진학했다. 우석학원은 1971년 고려대에 흡수됐기에 그의 학적은 고려대 법학과 57학번으로 처리돼 있다. “공부를 곧잘 해 고등학교까지 우등상을 놓친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지금의 연세대학교인 연희대에도 붙었지만 등록금을 낼 수 없어 전액 장학금을 주는 우석학원에 입학했죠.” 그는 집안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한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없는 재산을 털어 저를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내셨어요. 당시 시골에서 자식을 대학에 보내려면 가장 귀한 재산인 소를 팔아야 할 정도로 부담이 컸죠. 대학 건물은 소의 뼈를 모아 지었다며 우골탑이라 불렸어요.”
그러나 1959년, 대학교 3학년이 된 김효전 씨는 어렵게 간 대학을 자퇴했다. 아버지의 간척 사업이 실패해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아버지 사업이 실패하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시면서 집안이 급격히 어려워졌어요. 먹을 것도, 잘 곳도 없어 등록금은커녕 당장 먹고살 돈도 없었습니다. 그 당시엔 아르바이트란 개념도 없어 대학을 다니며 돈을 벌 방법도 없었죠. 미아리 산꼭대기에 천막을 치고 사는 형편에 학업을 이어가는 건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대학을 그만둔 것은 김효전 씨에게 평생의 한으로 남았다. “사회생활에 졸업장이 꼭 필요하진 않지만 학업을 끝내 마무리하지 못한 건 너무 아쉬웠어요. 졸업장이 없는 건 제 평생의 아킬레스건으로 남았습니다.”
월남전 파병부터 대안학교 교장까지
김효전 씨는 자퇴 후 1960년 장교 시험을 쳐 입대했다. “군대는 제 도피처였어요. 대학 시절엔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는데 군대에선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형편이 나아지지 않으니 미래가 막막해 전역을 미루다가 결국 월남 파병까지 갔죠.”
맹호부대 중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김효전 씨는 정글을 헤매며 생사의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다. “정글에서는 앞사람조차 제대로 볼 수 없기에 전략적으로 대형을 짜고 움직이는 전투는 사실상 불가능했어요. 먼저 눈에 띈 쪽이 죽는 잔인한 전장이었죠. 저도 죽을 고비를 두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는 부하 중 전사자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을 가장 큰 행운으로 여긴다. “지금도 6월 6일 현충일마다 현충원을 찾습니다. 중대장 계급 정도면 그곳에서 부하의 유가족을 만나기 마련인데 저는 그곳에서 찾을 이가 없어요. 이것만큼 엄청난 행운은 없을 겁니다.”
그는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군 무공훈장을 받았지만 무고하게 죽은 베트남인에게 사죄하고 싶다고 말한다. “먼 타지에서 한국 군인들이 수없이 전사했단 건 안타까운 일이에요. 하지만 한국군이 베트남 민간인, 심지어 아이들까지 사살한 것은 명백한 잘못이죠. 베트남 전쟁이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지만 그 전쟁에 참전한 것을 지금까지 뉘우치고 있습니다.”
김효전 씨는 1971년 제대한 뒤 공화당 사무국에 입사해 당보를 제작했다. 이후 1976년 유신 체제가 종결되며 당이 해산하자 서울시 사단법인 청소년육성회로 자리를 옮겼다. “고향이 전남 장흥이라 처음엔 의료보험공단 전남지사 부사장 자리를 추천받았어요. 서울에 남고 싶어 거절했더니 서울시 산하 사단법인인 청소년육성회에서 일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죠. 그곳에서 정년까지 16년이나 근무했습니다.” 청소년육성회 법인 사무총장을 맡은 그는 자퇴생과 학교 밖 청소년을 위한 대안교육기관 동양중고의 교장도 역임했다. “청소년들이 건전한 여가를 보내고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도록 지도했어요. 경찰이 데려온 탈선 학생들과 상담하고 검정고시를 치르거나 대학에 진학하도록 도왔죠.” 교장으로서 학생들을 올바른 길로 이끈 것은 그에게 평생의 자부심이다. “졸업 후 제자들이 저를 다시 찾아와요. 결혼한다며 주례를 부탁한 학생도 있고, 대학에 가서 총학생회장을 하는 학생도 있었죠.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자란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 큰 보람을 느낍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수기를 모아 책도 냈다. “신문에 광고를 내 역경을 딛고 노력한 분들의 수기를 모았어요. 그렇게 저마다의 사연을 ‘뜻 있는 곳에 길’이라는 책으로 엮어 전국에 배포했죠. 통영에서 글을 보내온 분이 서울까지 올라와 제게 감사 인사를 전하던 순간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장으로 재직하면서도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줄곧 마음속 짐으로 남아있었다. “동료 교사들에게 제가 대학을 나오지 못했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어요. 그 부끄러움이 늘 가시처럼 마음에 박혀 있었죠. 이 한을 풀 기회는 영원히 없을 줄 알았는데 다시 대학에 다닐 수 있어 정말 기쁩니다.”
“오직 즐겁기 위해 하는 공부”
1991년 퇴직 후 세계 곳곳을 돌며 평화 운동에 힘쓰던 김효전 씨는 올해 고려대 미디어학부 김민환 명예교수의 추천으로 고려대 한문학과에서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1959년 대학을 자퇴한 지 66년 만이었다. “다시 대학에 간다고 하니 미국에 있는 손자들에게 응원 전화가 왔어요. ‘할아버지 파이팅’이라는 한마디에 힘이 펄펄 났죠. 공부에 흥미가 없어 억지로 학교에 다니던 손녀도 제가 공부한다고 하니 태도가 싹 달라졌다더군요.” 김민환 교수는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그에게 한문학과 진학을 권했다. 김 교수의 말을 받아들인 김효전 씨는 한자능력검정시험을 준비해 고려대 한문학과 3학년으로 복학했다. “은퇴했으니 돈을 벌 필요도 없고, 젊었을 때처럼 법조인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저 못다 한 학문을 배우고 정신을 채우는 철학을 공부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습니다.” 평소 동양 철학 도서를 즐겨 읽던 김효전 씨는 한문학과 진학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아무것도 모르던 6살 때 매 맞지 않으려 무작정 외웠던 글을 지금 다시 공부하니 감회가 남달라요. 글자 하나하나에 뜻이 담겨있는 게 대단하고 공부할수록 사고가 또렷해지는 느낌이에요.” 그는 현재 ‘논어읽기’, ‘맹자읽기I’, ‘한문산문의세계’, ‘한문학비평의세계’, ‘한자의이해’ 과목을 수강하며 첫 학기를 보내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시작한 공부는 녹록지 않았다. 김효전 씨는 전자기기가 없어 수업을 따라가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처음엔 수업 자료가 전자 문서로 올라와 곤란했어요. 저는 수업 시간에 가만히 앉아 교수님을 바라보기만 하는데 다른 학생들은 바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더라고요. 교수님이 소식, 소동파, 두보, 이백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글을 설명하는데 노트북이 없으니 원문을 볼 수가 없어 갑갑했죠. 결국 50만 원을 주고 노트북을 샀습니다.” 첫 중간고사 준비도 쉽지 않았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을 물어볼 사람을 찾는데 ‘논어읽기’ 수업 조교님이 중학교 한문 선생님을 연결해 주셨어요. 그런데 그분도 명확한 대답을 주시지 못하더라고요. 어떻게 의문을 해결해야 할지 막막했죠.” 익숙하지 않은 공부 방식으로 준비한 첫 시험의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엊그제 중간고사를 쳤는데 잘 보지 못했어요. 이렇게 시험을 망친 적은 처음이에요. 교수님들이 제 아들뻘이라 더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학교를 그만둘까도 고민했죠.” 그는 중간고사를 못 봤지만 기말고사에서 만회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논어 조교님이 학교 도서관에 있는 <고문진보>라는 책을 소개해 주셨어요. 책을 펼치니 제가 찾던 한문 해석이 모두 정리돼 있더라고요. 이제 공부 방법을 찾았으니 기말고사는 잘 보고 말 거예요. <고문진보>가 있는 저는 무적이랍니다.”
김효전 씨에게 학교생활은 하루하루가 새로운 도전이다. “다른 학생들과 세대 차이가 있으니 강의실에 앉아있을 때 괜히 불편해요. 혹시 제가 학생들의 공부를 방해하진 않을까 걱정도 많죠. 그래도 몇몇 학생들과는 인사를 주고받아요. 먼저 다가와 인사해주는 학생들을 보면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다른 학생들처럼 과잠도 구매했다. “카키색 과잠을 샀는데 반응이 아주 좋아요. 교수님들도 제가 동료처럼 느껴진다며 칭찬해주시더라고요. 이제 날씨가 더워져 입기 힘들 텐데 여름 과잠도 있으면 좋겠어요.”
김효전 씨의 목표는 한문과 동양 철학 분야에서 글을 쓸 수 있을 만큼 실력을 쌓는 것이다. “앞으로 졸업까지 2년이 남았는데, 조금 더 노력하면 한문학과 과목뿐 아니라 동양 철학 수업도 함께 들을 수 있을 것 같아요. 한문과 동양 철학을 연결해 더 박학다식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그는 졸업 후 대학에서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고 싶다고 말한다. “조상의 묘를 찾은 사람들이 한자를 몰라 비석 앞을 그냥 지나치는 모습을 보면 안타까워요. 지역별로 비석에 새겨진 한자를 번역해 책으로 엮고 싶어요.”
김효전 씨는 녹록지 않은 환경 때문에 공부를 이어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손에서 책을 놓지 말라고 조언한다. “수불석권(手不釋卷), 손에서 책을 놓지 말고 늘 글을 읽으라는 말이에요. 저는 대학을 자퇴했지만 책은 손에서 놓지 않았어요. 아침에 땅을 파고 와도 저녁에 한 시간 덜 자며 책을 읽으면 자신감이 생겼거든요. 저처럼 학교를 그만둬도 다시 공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든 기회는 찾아오니 그전까지 꼭 손에서 책을 놓지 않기를 바랍니다.”
글 | 박효빈 기자 binthere@
사진 | 김준희 기자 he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