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을 걷는 선비> 원작자

만화로 국어 수업 진행하기도

“숨통이 되는 꿈을 간직하세요”

조주희 작가는 “용기가 부족해 전업 작가 대신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며 “더 일찍 용기를 내지 못했단 아쉬움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조주희 작가는 “용기가 부족해 전업 작가 대신 교사라는 직업을 택했다”며 “더 일찍 용기를 내지 못했단 아쉬움도 있지만 돌이켜보면 최선이었다”고 말했다.

 

  국어 교사 겸 만화 작가인 조주희(국어교육과 94학번) 씨는 약 20년간 만화계와 교단을 오갔다. 현실의 벽에 부딪히기도 하고 스스로 재능을 의심하기도 했지만 그는 두 번의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는 한편 만화를 통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 교사가 됐다. 그는 국어교육과 석사 학위까지 취득하는 등 두 분야에서 모두 의미 있는 성과를 이뤄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며 활력을 얻었고 퇴근 후 고요한 저녁에 만화를 그리며 행복한 휴식 시간을 보냈어요.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소중한 벌이이자 눈에 보이는 내 꿈이 됐죠. 돌이켜보면 제 진짜 꿈은 만화 그리는 교사였나 봅니다.”

 

  펜을 내려놓고 분필을 들다

  조주희 작가는 유년 시절부터 늘 이야기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어렸을 때 소설과 영화, 만화를 닥치는 대로 많이 봤는데 그중 만화가 제일 재밌었어요. 국내 만화는 물론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 같은 일본 만화를 보며 만화 속 장면을 따라 그리곤 했죠. 그는 초등학교 시절 신일숙 작가의 만화 <아르미안의 네 딸들>을 보고 본격적으로 만화가를 꿈꾸기 시작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던 주체적인 네 명의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설정이 인상 깊었어요. 나도 저런 작품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에 만화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죠.”

  오랫동안 만화가를 꿈꿔왔지만 조주희 작가는 1994년 미술대학이 아닌 고려대 국어교육과에 진학했다. 만화가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좋지 않았기에 고른 차선책이었다. “당시엔 만화가가 제대로 된 직업으로 여겨지지 않았어요. 만화는 먹고 살기에 충분한 직업이 아니었죠. 그래도 만화를 계속 그리고 싶어서 퇴근 후나 방학 등 비교적 자유시간이 많은 교사를 선택했어요. 가장 좋아하는 과목이 국어이기도 했고요.” 

  전공 선택에서는 현실과 타협했지만 꿈까지 타협하지는 않았던 조주희 작가는 대학 시절 내내 만화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중앙동아리 그림마당에 들어가 만화를 그렸으며 2년간 본지에 시사 풍자 4컷 만평 ‘고러치’를 연재하기도 했다. “고대신문 만평을 그리던 선배의 제안으로 후임을 이어받아 1학년 2학기부터 만평을 그렸어요. 마감날마다 머리를 뜯으며 만화 소재를 고민하고 월급을 받으면 받은 돈을 다 쓸 때까지 밤새 안암동 술집을 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대학 내 정치에 대한 관심이 뜨겁던 시기였기에 정치·시사 문제를 풍자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그땐 학생들도 진영을 나눠 NL계열과 PD계열로 나뉘어 정치적 대립이 치열했어요. NL계열은 반미와 남북통일을 강조했고, PD계열은 계급투쟁을 중심으로 북한 체제에 비판적이었죠. 그래서 특정 진영에 힘이 실어주는 내용의 만평을 그릴 때면 식은땀이 났어요.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면서 무모한 용기가 있었네요.”

  졸업을 앞두고 조주희 작가는 다시 현실적인 고민에 부딪혔다. “현실을 생각해 국어교육과에 진학하긴 했지만 마음 한구석엔 늘 만화가란 꿈이 있었어요. 하지만 만화가로 데뷔해 성공할 거란 확신이 없었죠. 당시엔 유명 작가에게 배우며 만화가로 데뷔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저는 늘 혼자 그려서 자신도 없었고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들에 비해 실력도 부족했으니까요.” 설상가상으로 그가 졸업하던 해인 1997년에는 IMF 외환위기가 닥쳤다. “졸업을 앞두고 IMF가 터지니 선택의 여지조차 사라졌어요. 안정적인 수입이 필요해 만화가의 꿈을 접고 임용고시 준비를 택했죠.” 졸업 후 1년 만에 임용에 합격한 그는 1999년부터 국어 교사로 교편을 잡았다.

 

  낮에는 교사, 밤에는 작가

  조주희 작가는 교사가 된 뒤에도 만화 그리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마침 대중문화가 활기를 띠면서 만화계에도 독립만화 붐이 일었고, 조주희 작가도 만화실험단체 화끈에 합류해 자신만의 색을 담은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대학 만화 동아리 출신들이 인디 잡지에 독립 만화를 싣는 게 유행이었어요. 저도 제 만화를 싣기 위해 임용에 합격하고 만화를 다시 그리기 시작했죠. 온라인으로 제 만화가 퍼져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읽는다는 게 정말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신문의 제안을 받아 교사의 일상을 담은 만화 ‘조선생의 땡땡이’를 12년간 연재하기도 했다. “학생들과의 재밌는 에피소드, 학교 업무의 고충처럼 현실감 넘치는 내용을 그렸더니 주변 선생님들이 정말 많이 좋아해 주셨어요. 그때 받은 칭찬과 응원 덕분에 지금까지 교사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잡지와 신문에 자신의 만화를 연재하면서도 상업 만화가로서의 꿈을 포기하지 못한 조주희 작가는 낮에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만화를 그리며 공모전을 준비했다. “예술성 짙은 실험적인 작품보다 상업 만화에 더 관심이 컸기에 데뷔라는 목표를 꾸준히 갖고 있었어요. 거친 중학생을 상대하며 공모전까지 준비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기에 교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죠. 상업 데뷔를 하게 되면 교사를 그만둘 거란 생각으로 포기하지 않고 공모전을 준비했어요.” 성실히 노력한 끝에 그는 2001년 서울문화사 잡지 <윙크>의 신인 공모전에서 학원 로맨스 작품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상업 만화가로 데뷔했다. “이전엔 개성을 뽐내는 그림체로 독립만화를 그렸지만 공모전을 준비할 땐 일부러 상업 만화 그림체를 따라 그렸어요. 처음 도전한 순정 만화라 오글거리고 어색했지만 지금은 순정 만화를 아주 잘 그린답니다.

  데뷔 후에도 교사로서의 삶은 계속됐다. 만화가라는 직업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상업 데뷔만 하면 모든 게 풀릴 거란 생각과 달리 막상 데뷔하니 생각보다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더라고요. 만화 편집부에서도 만화계가 더 힘들다며 교사를 그만두지 말라고 말릴 정도였죠.” 그러나 전업 만화가에 대한 동경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만화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불안감을 겪기도 했다. “교사 일을 병행하다 보니 새 작품 준비가 더뎌지고, 뒤처진단 생각으로 슬럼프에 빠질 때도 많았어요. 전업 만화가였다면 새 작품들을 더 빨리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죠.

  자신의 이름으로 된 만화책을 갖고 싶었던 조 작가에게 찾아온 기회는 육아휴직이었다. 2009년 육아휴직에 들어간 그는 스토리와 작화를 모두 맡은 요리 만화 <키친>을 출간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오전 시간엔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이며 이야깃거리를 찾았어요. 육아와 만화를 병행하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틈날 때마다 도서관을 찾아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훈련을 한 덕에 스토리 작가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었죠.” 그는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로 ‘할머니의 두부 요리 이야기’를 꼽았다. “자극적이지 않고 담담한 두부처럼,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어요. 두부가 먹고 싶으니 내일까진 살아 있어야겠다는 할머니의 대사를 쓸 땐 눈물이 찔끔 났죠.” 짧은 에피소드로 깊은 감동과 여운을 전한 <키친>은 2011년 문화체육관광부가 주최하는 국내 3대 만화상 중 하나인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키친>은 상업적 성공을 거두진 못해 기대만큼의 수입을 올리진 못했다. “작품성은 인정받았지만 경제적으론 나아지지 않았어요. 충분한 수입이 있으려면 대표작이 필요하단 생각이 들어 모두가 아는 작품을 만들고 싶었죠.”  그는 스토리 작가로 전향해 뱀파이어 판타지 로맨스 만화 <밤을 걷는 선비>를 쓰기 시작했다. “반드시 상업적으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을 갖고 글 작가로 참여한 첫 작품이에요. 조선시대와 뱀파이어라는 이질적 요소를 결합해 성공 공식을 녹여냈죠.” 2012년 한승희 그림 작가와 협업해 연재를 시작한 <밤을 걷는 선비>는 3년 만에 누적 122만 독자를 기록하며 플랫폼 대표작으로 자리 잡았다. 이듬해에는 ‘오늘의 우리문화상’을 다시 한 번 수상하며 작품성까지 인정받았다. “처음엔 자극적이고 흥미로운 요소로 독자들을 끌어들이겠다는 생각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삶을 돌아보게 하는 주제 의식을 담은 작품이 완성됐어요. 연재 내내 제가 만든 세계에 푹 빠져 살았고, 지금도 만화 속 인물들이 제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느낍니다.”

 

  교실과 만화의 경계 허물어

  조주희 작가는 지금도 교사이자 만화가로서의 삶을 균형 있게 이어가고 있다. “평일엔 교사로 8시간, 만화가로 3시간을 보내요. 주말엔 주로 만화 작업을 하니 매주 두 생활이 거의 반반씩 나뉘죠. 아이들이 어릴 땐 새벽에 일어나 작업하곤 했지만 지금은 아이들도 커서 작업 시간이 넉넉해졌습니다.” 그는 교사와 만화가가 궁합 좋은 직업이라고 말한다. “낮에는 중학생들과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내고, 밤에는 조용히 나만의 세계에 빠져 창작의 시간을 누려요. 제가 경험해 보고 싶은 이야기들을 만나는 시간이죠.” 

  그의 창작 활동은 교실에서도 이어진다. 조주희 작가는 수업에 만화를 적극 활용해 학생들의 흥미를 끈다. 코로나19로 대면 수업이 어려운 시기엔 <박씨전>을 만화로 그려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학생들이 최대한 집중할 수 있도록 재밌는 방법들을 고민해요. 특히 만화는 수업 몰입도를 높이고 문학 작품의 맥락을 이해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죠. 문학작품을 만화로 보여주면 학생들이 정말 좋아해요.” 그는 만화가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학생들과 친밀해지기 위한 도구로 삼았다. “오랫동안 한 지역에서 교사로 일했기 때문에 제가 만화가라는 사실을 많은 학생들이 알고 있어요‘만화가 선생님’이라는 신기한 직업 덕에 학생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어요. 국어는 학생들의 생각을 말과 글로 끌어내는 과목이라 교사와의 친밀감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만화를 이용한 수업이 도움이 됐죠.” 2022년엔 고려대 국어교육과 대학원에 진학해 국어 수업에 만화를 활용했을 때의 효과를 연구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국어 수업에 활용해 만화를 왔는데 그 효과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싶었어요. 앞으로는 표현력과 소통 능력이 더욱 중요해질 텐데 그 능력을 키우는 데 만화 교육이 큰 역할을 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굳어가는 머리와 노안을 이겨내며 겨우 연구를 끝내니 오랜 숙제를 마친 기분이었죠.” 

  조주희 작가는 <왔구마 고구마구마> 시리즈 · <쿠키런 펀펀 상식> 시리즈 등 다양한 학습만화와 어린이 동화를 그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하기도 한다. 그는 어린이를 위한 학습만화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로 ‘흥미를 꼽는다. 아무리 책을 싫어하는 아이라도 끝까지 읽을 수 있도록 학습만화는 무조건 흥미진진해야 해요. 물론 지식과 학습 요소도 자연스럽게 녹여내야 하죠. 그는 학습만화가 자신에게 쉬어가는 구간과 같다고 말한다. 지식을 만화로 재밌게 풀어내는 작업은 자신 있어요. 웹툰은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이 크지만 순수한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를 만드는 시간은 오히려 제가 충전되는 시간이에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에 조급해질 때도 있지만 조주희 작가는 교사와 작가를 겸하는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밤을 걷는 선비>가 성공한 뒤 제 꿈이었던 전업 만화가로 활동할 기회가 많았어요. 하지만 만화가란 직업은 혼자서 세계를 구상하고 완성해야 해 너무나 외로웠죠. 오히려 학생들이나 동료들과 교류하고 소통하는 시간이 저에겐 큰 활력이자 창작의 자양분이 됐어요.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했을 때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안도했던 기억이 납니다.” 만화가와 교사, 두 역할을 해내는 일이 쉽진 않지만 그에게 두 세계는 서로를 지탱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다. “두 직업은 서로에게 숨통을 터주고 도망칠 구석이 돼 줘요. 만화가로 한계를 느낄 땐 교사라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고, 교사 일에 지칠 땐 만화가 제게 숨 쉴 공간이 됩니다.”

  조주희 작가는 꿈이란 반드시 전부를 걸어야만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현재 다른 일을 하고 있어도 마음속에 품어온 꿈이 언젠가 여러분 삶의 숨통이 돼 주고, 때론 동아줄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열어줄 수 있어요. 여러분도 현실적인 이유로 내려놓은 꿈이 있다면 다시 주워 들기를 바랍니다.”

 

글 | 서윤주 기자 sadweek@

사진 | 임세용 기자 syl@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