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정경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방학 중에 진행된 민주주의 특강 내용을 담은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발간했다. 지식인의 역할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낸 이번 책은 한국 민주주의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온 최 교수가 6년 만에 내 놓은 것이다. 현재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정치학 비전공자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기술됐고, DJ정부의 공과와 세계화 현상과 같은 최근의 상황들을 본격적이고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
본지는 지난 13일(수) 우리 사회가 다시 한번 진지하고 열정적으로 민주주의와 마주서게 되기를 바라는 최 교수의 이야기를 고세훈(경상대 행정학과) 교수를 통해 만나봤다. 두 교수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의 민주주의가 과연 위기에 봉착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해 고민해 보며 ‘한국적 민주주의’의 특수성과 최 교수의 세계를 들어본다. 


 정리 김희선 취재부장
 
reporter@kunews.korea.ac.kr 
  
고세훈  과거 저술들과 비교, 이번 책의 장점과 출판 계기, 그리고 이 책의 위상 등에 관련된 전반적인 것들을 말씀해 주십시오.

최장집 민주주의를 주제로 한 시민교육을 염두에 뒀기 때문에 훈련받은 정치학자나 정치학을 연구하는 전공자나 전문가가 아니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썼습니다. 민주주의가 교육 없이 뿌리내리고 강화될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를 많이 가져왔습니다. 정치는 모든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관점을 갖고 연구할 수 있는 일상 속에서의 현상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 더 체계적이고 분석적으로 일상적 언어와 담론의 수준을 넘어서 이해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따라서 정치의 이해와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서는 시민 교육이 강화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책을 쓴 목적도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민주화가 이루어진 이후로 15년의 민주주의 경험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고 새로운 문제들이 많이 제기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다루는 연구들은 발견하기 어려웠습니다. 수요는 있는데, 정치학자들이 공급자의 역할을 해주지 못했던 것이죠. 그래서 대중들이 접할 수 있는 저술의 필요를 느끼게 됐습니다.

한국민주주의가 현 단계에서 위기에 처해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투표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시민 사회가 냉전 반공 논리에 절어있고 지역감정, 성장 지상주의 등이 여전히 한국 민주주의를 압도하는 상황입니다. 이와 관련, DJ정부에 대한 총체적 평가와 한국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선생님의 근거를 다시 한번 정리해 주십시오.

책 제목에서 드러나듯이 중심적인 분석대상은 김영삼.김대중 정부이고 특히 김대중 정부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하게 DJ정부를 주제로 대상화하거나 DJ 정부 비판이 중심 주제는 아닙니다. DJ정부는 민주화 이후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뤘다고 할 수 있고 자체로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고 봅니다. 내가 주목한 것은 오랜 야당이었던 정치세력이 민주주의 운영책임을 맡았던 시기에 무슨 일이 있었나 하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DJ정부 하에서의 한국 민주주의는 약해졌다고 이해되고 DJ정부의 부정적 측면이 드러난다고 봅니다.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라고 진단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는 정당체제의 저발전입니다.정치가 보수 엘리트의 사익 추구의 일상사로 전락하고 시민이 정치에 대해 주제를 갖고 참여하지 못하면서 투표율의 하락과 정치적 냉소주의가 나타나고 있죠.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일차적으로 중요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가 실제로 정치와 사회를 변화시키는 측면, 즉 민주주의의 내용적 측면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는 항상적으로 권위주의로 복귀할 수 있는 요소를 안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심화시키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특히 IMF 위기와 더불어 몰아닥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물결은 정치의 역할을 폄하하고 축소시키고 있습니다. 정치는 경제의 흐름을 방해하는 비효율적인 영역이라는 인식이 거대 언론을 통해 확산되어 왔습니다. 중산층 해체, 고용구조나 직업구조 재편에서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하에서 계급구조화는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세계화의 당연한 결과로 치부해버리면 정치의 역할이 존재할 공간은 없습니다. 사회적 고용과 분배의 문제를 제도적으로 완화시키는 것이 정치의 중요한 기능입니다. 정치가 이런 기능을 하려면 이념적 지형이 다원화 돼야 하는데, 우리의 현실은 냉전반공주의라는 오랜 지배적 이념의 틀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보수언론이 회자시키는 단어인 ‘제왕적 대통령’이나 ‘CEO대통령’이란 개념들이 왜 이 시기에 부적절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한지, 또한 어떤 논리로 냉전반공주의가 지역주의와 정당체제의 미발전에 기여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제왕적 대통령이 주류 언론과 그들이 동원한 지식인들에 의해 주도적인 이슈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법적.제도적 범위를 벗어난 권력의 사유화와 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대한 비판이 대통령 주위의 부패에 대한 공격과 결합됐기 때문입니다. 제왕적 대통령 담론의 핵심내용은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권위주의적이고 제왕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선 사실이 아닙니다. 김대중 대통령은 정권 후기로 오면서 레임덕으로 인해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었고 심지어는 당 총재직마저 떠난 시점이었습니다.

주류 언론이 제왕적 대통령론을 제기하는 것은 그 정치적 목적을 의심하게 만듭니다. 민주주의 하에서 대통령제가 어떻게 다른 제도들과의 유기적 관계 속에서 운영되어야 하는냐가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 개인에 대한 공격에 초점을 두는 것은 현직 대통령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정치적 목적 다름아닌 것이죠. 이런 관점에서 제왕적 대통령의 대안은 민주적인 대통령이 아니라 CEO 대통령인데, 그것은 사기업의 논리를 정치의 영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으로 정치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경험하는 여러 현상들, 이를테면 지역감정에 기반한 정당체제는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냉전반공주의라는 협애한 이념적 지형의 결과물입니다. 냉전반공주의는 다양한 이념적 정향과 사회적 갈등의 표출을 가로막음으로써 지역의 불균등 격차의 문제라든가 엘리트 충원의 문제들이 과대대표되게 만듭니다. 다른 갈등이나 이익들이 표출될 수 없는 구조에서 지역 감정은 사람들이 가장 직접적으로 그리고 가장 쉽게 동원할 수 있는 균열축이 되어버립니다.

국가가 무력해지고, 민주화 이후 보수 기득권층의 권력이 강해지면서, 노동은 여전히 극도로 수세에 몰리고 있습니다. 지금 상황에서 노동 있는 시민사회, 노동 있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얘기할 수 있습니까.

노동의 정치세력화를 낙관적으로 전망하기는 어렵습니다. 노동운동 리더십의 현실적 기반이 취약한 것이 가장 큰 저해요인입니다. 노동은 한 사회의 가장 중심적인 생산자 집단입니다. 민주주의는 사회의 모든 세력들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지 않고 정치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며, 가장 중요한 중심 세력인 노동이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수요건입니다. 노동이 정치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서 현재의 체제가 민주주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책의 결론에서 자유주의나 공화주의의 중요성을 지적했는데, 그것은 노동의 이해와 관점이 정치체계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에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문제를 논할 때 사회주의적 시각을 떠올리지만, 나는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사회의 갈등이 자연스럽게 표출되고 해소되는 과정을 민주주의 발전의 조건으로 지적한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은 힘이 약해서라기보다 스스로 힘을 정치적으로 조직하는 데 이념성이 지나쳐서 약화된 것입니다. 이념성으로 인한 내부 문제로 힘을 소진하는 것이죠. 노동문제를 사회주의와 같은 이념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대표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  「조선일보」와의 갈등이 있었을 때 그것이 이념 대립으로 규정됐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은 이념 이전에 사상과 기본권에 대한 일종의 도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립의 축을 이념 중심으로 끌고 갔던 것이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보수 기득권 층에게 빌미를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내면을 검증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것이야말로 전체주의적 발상인 것이죠. 모든 문제를 친북이냐 아니냐라는 흑백논리로 접근하는 시각에 저항한 것입니다. 일종의 휴머니즘 자유주의 저항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도와줬던 사람들은 사상 학문의 자유를 강조하면서 이념 대립으로 당당하게 맞서기를 바랬습니다. 진보적인 이념을 내세우며 「조선일보」와 일전을 치루지 않은 것에 대한 비판도 있었습니다. 사태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생각은 이념대립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어요. 사회가 그 사건을 이념 대립으로 규정, 문제를 개인과 「조선일보」와의 범위를 넘어, 여러 형태의 논쟁들이 끼여들고 논쟁이 됐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내 개인적인 견해는 고 교수의 생각과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책에서 한국의 자유주의가 냉전반공주의와 최근의 시장지상주의와 동일시 되었다고 말씀하시며, “한국의 자유주의는 보수세력에 의해 오염되거나 왜곡되고, 그 반작용으로 비판적 운동세력에 의해 버림받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께서는 서유럽의 민주주의를 추종했던 자유주의의 원래 의미가 복원돼야 하고, 공화주의적 전통이 새롭게 확립되어야 할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민주주의는 그리스 도시국가 시기부터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와 제도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족적으로 민주주의는 발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민주주의가 현대에 들어와서 발전한 것은 자유주의와 공화주의의 이념이 상호 긴장하면서 서로 뒷받침됐기 때문입니다. 서구에서는 자유주의가 먼저 발전하면서 그 토대에서 투표권의 확대라든가 시민권의 원리가 실현된 반면에, 우리는 이런 토대가 약하기 때문에 판단하기 어려운 가치의 갈등들을 대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유주의는 도덕적 자율성을 갖춘 시민 개개인이 민주주의의 기반이라고 본다는 점에서 어떤 다른 이념보다도 존중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공적 영역과 공공선에 대한 관심을 강조하는 공화주의를 수용하지 않고서는 한 사회는 뿔뿔이 개인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공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한 사회는 갈등의 강도가 과도하게 높아 해결책은 없고 극단의 이기주의와 개인주의가 팽만한 사회가 되기 쉽습니다.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여주는 가장 극명한 지표는 참여의 위기, 즉 투표율의 하락이입니다. 특히 대학생들의 투표율은 상당히 저조한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4?9혁명 이후 한국민주화과정을 노동운동과 함께 견인했던 학생운동의 중요한 역할에 주목하시고 계십니다.

한국은 민주주의가 뿌리내려야 할 시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로부터 멀어지는 조로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낮은 투표율은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현상과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고 교수께서 지적하신 정치적 관심이나 열정의 부재에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미 민주화는 됐고 모든 학생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공동의 이슈는 어쩌면 실현됐기 때문에 과거와 같은 집합적 열정의 분출은 어렵다고 봐요. 그래서 학생 운동의 방향도 과거 민주화 운동시기와 다르게 열정과 책임감을 정렬하고 소명 의식을 갖고, 우리 사회의 문제를 안는 방향으로 전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선생님의 삶에서 ‘정치학연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정치학은 정의의 문제를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입니다. 정치 현실과 아울러 도덕적인 문제, 철학적인 문제 등 어떤 것이 좋은 사회고 바람직한 사회인지 규범인 문제를 아울러 담고 있는 것이 정치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고 할 게 많고 도전할 만한 학문입니다. 개인적으로 정치학을 하면서 어떤 실현 가능한 대안을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하나의 실천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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