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아톤 우리가 초원이보다 초원이 어머니에게 주목해야 하는 이유 한석규 이후 한동안 부재중이었지만, 동심어린 해맑음으로 또 다른 ‘순수청년’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한 조승우의 캐스팅과 자폐아 열연은 영화 <말아톤>의 성공을 일찌감치 예견했다. 영화 속 간간히 뿌려진 초원이의 좌충우돌 에피소드가 흥행대박의 촉매 역할을 톡톡히 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주인공의 열연과는 상관없이, 한 사람의 일대기 혹은 인생 역정 극복기를 담은 영화에의 몰입은 태생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 공간적인 배경을 달리한 이국적인 풍광, 생경한 캐릭터가 시선을 끌지만 공감대 형성이 어렵고 무엇보다 이미 공공연히 정해진 텍스트에 어쩌면 가장 큰 즐거움의 원천이라 할 수 있는 관람객이 만들고 이어나가는 의미 재생산 영역을 찾기 힘들다는 것. 그러나 이 영화에서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은 극 중 조승우의 연기와 자신의 즐거움을 찾은 초원이의 내러티브가 아니라, 초원이가 진심으로 말아톤의 즐거움을 찾게 된 과정에 있다. 자신만의 세계로 굳게 닫힌 아이의 마음을 열고 타인과의 소통을 위해 노심초사 끝에 시작한 말아톤. 이 가시밭길의 한가운데는 억척스러운 초원이의 어머니가 있다. 주변의 모든 것들과 소원해진 채 불편한 아들을 위한다며 달리기를 강요하고 달리기에 모든 것을 걸었던 그녀. 언뜻 더 좋은 영어 발음을 위해 아이를 수술대 위에 올린, 뜨거운 자식 사랑이란 미명하에 모든 부작용들을 무마하려는 한국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는 것 같지만 초원이 어머니의 이런 ‘극성’이 아니었다면 초원이는 그렇게 좋아하던 초코파이를 버리고 자신에 의한 말아톤을 즐길 수 있었을까? 영화 속에서도 보이지만 정신 지체아들의 재활 교육은, 주체적인 사고가 어렵다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아이의 특성은 도외시 된 채 ‘일괄적 공장 단순 조업만이 살 길’이라 권해지고 있는 현실. 장애아 전담 교육기관에서도 아이가 다른 사회적 구성원들과 자연스레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다양한 모색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 속에서 초원이 어머니의 극성은 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당연한 귀결인 것이다. 초원이는 대문을 나설 때마다 거역할 수 없는 숙명처럼 위압적인 시멘트 담을 마주한다. 초원이는 그 담으로 인해 사람들과 함께하는 ‘초원’을 현실이 아닌 tv 속 동물의 세계에서 찾는다. 그의 눈과 마음을 tv로 내몬 것은 집 앞 시멘트 벽의 거대함이 아니라 완고함으로 중무장한 우리들의 가혹한 무관심 일 것이리라. 관람 후 우리들이 보냈던 초원이에 대한 관심어린 모습들. 그것이 위선의 눈길이 되어 하늘로 보낸 산골소녀 영자처럼, 또 다시 초원이의 마음을 얼어붙게 하지 말기를 조심스레 기도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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