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라시드를 처음 만난 것은 기숙사 휴게실 TV 앞에서였다. 방글라데시에서 온 외국인 유학생인 그는 언어 문제 때문에 주로 OCN을 즐겨보는 다른 외국인 유학생들과는 달리 휴먼 다큐멘터리인 ‘인간극장’의 열렬한 시청자였고, 평소 휴게실에서 그 프로그램을 자주 보던 내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호기심에 간단한 인사 몇 마디를 나누었지만 대화는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낯선 이와의 대화에 서툰 내가 처음 만난 외국인과 할 수 있는 얘기라야 그 나라에 대해 질문 몇 마디 던지는 것이 전부인데, 방글라데시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너무 짧았던 것이다. 고작해야 인구밀도가 우리나라보다 높은 나라라는 점 그리고 가난해도 국민들은 행복하다는, 내 눈에는 어쩐지 안일해(?) 보이기만 하는 행복지수 1위의 나라라는 정도가 내가 아는 방글라데시의 전부였으니 그 나라에 대한 화제로 삼기에는 크게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매번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헤이 프렌드!’를 크게 외치며 반가워하는 그에게 그냥 웃어만 주고 지나치는 것이 늘 미안했는데, 올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 은행과 무하마드 유누스 박사가 결정되면서 우리에게도 공통의 화제거리가 생겼다. 라시드에게 그 사실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뜻밖에도 그는 자기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그라민 은행의 회원이었다며, 이미 여러 번에 걸쳐 융자를 받았었고, 그 덕에 자기도 지금까지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는 사연을 들려주었다. 제 3세계 국가에서 온 유학생들은 대부분 그 나라에서는 상류층이라고들 하는데 라시드는 그런 부류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시드의 가족이 처음으로 융자를 받은 돈은 우리 돈으로 겨우 2만원. 하지만 라시드는 그라민 은행에서 대출 받은 것은 돈보다도 ‘삶에 대한 의지’였다고 말했다. 가난을 무능과 동일시하는 사회의 편견을 비판없이 그대로 수용했던 자신과 가족이 소액 융자를 받으면서 비로소 인생을 설계하고, 꿈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그의 고백. 결국 가족들 스스로의 힘으로 대물림되어 오던 빈곤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였다는 그의 말에는 어딘지 묵직한 울림이 있었다. 
 
그라민 은행의 소액 융자사업에서는 일방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도, 무조건 도움을 받는 사람도 없다고 한다. 다만 빈민에 삶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우러나는 동등한 관계와 믿음이 있을 뿐. 무조건 적인 이해와 관용 앞에 빈민들은 98%의 상환율로 보답함으로서 가난한 나라 방글라데시에는 평화가 일궈졌다. 라시드는 노벨 재단이 그라민 은행에게 노벨 경제학상이 아닌 노벨 평화상을 준 까닭은 그라민 은행이 보여준 ‘평화를 이루는 방법’을 서양인들이 이제야 이해했기 때문인 것 같다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검은콩 우유를 마시던 라시드가 문득 묻는다. “그런데 예전에 너희 대통령은 왜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 같니?” 요즘 북한의 핵 때문에 어지럽게 돌아가는 사정을 대강 알고는 묻는 듯 했다. 햇볕정책으로 남과 북이 비로소 화해 무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둘러댈 수도 있었지만 라시드에게 나는 아무런 되돌려 줄 말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요즘 우리에게 ‘평화’는 너무 뒷전에 있는 듯 했기 때문이다. 
<쇠침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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