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權鎭圭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1942년부터 조각을 시작하여 1973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그의 삶은 조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생경했던 테라코타라는 장르를 개척했던 그는 추상조각과 개념미술 계열이 유행하던 1960년대에 인물 흉상들을 통해 독특한 개인 양식을 이루었던 사실주의 조각가였다. 그의 작품은 장황하기보다 소박하고 현대적이기보다 복고적이어서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미술사조에는 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권진규를 아는 사람은 그를 비운의 조각가로 부른다. 자살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미술사에 남겨진 예술가들 가운데 자살한 사람이 많고, 사람들은 이런 예술가의 자살은 예술이라는 이름에 기대어 다른 범인凡人의 자살과는 차별을 두고 싶은 유혹을 느낀다. 맞닥뜨린 운명의 물결을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맞아 거기에 자신을 내던진 예술가에 대한 환상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권진규는 그러한 사람들의 기대에 잘 맞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시대의 흐름에 맞서 실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한 시대를 풍미하였지만 극적인 삶을 살다간 비범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1973년 그는 힘든 한해를 보내고 있었다. 세상과 맞서기에는 이제 너무 노쇠한 걸까? 당시  그는 병마에 시달리며 생활고에 힘들어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1월초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현대미술실을 개관하기 위해 그를 만났고, 권진규는 자신의 작품이 본교 박물관에 수장된다는 소식에 몹시 기뻐했다고 한다. 박물관은 1월에 <마두>와 <자소상>을 구입하였고, 2월초에 <비구니>를 기증 받았다. 그리고 5월 3일 그는 본교 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전에 참석하고, 다음날 오전에 다시 박물관을 방문해 인생을 돌아보듯 작품을 몇 번이고 둘러보고는 도록 몇 권을 얻어서 아틀리에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지인과 제자에게 “인생은 空, 破滅이다. 거사 午後 6時”라는 유서를 써서 부친 후 장례비 조로 약간의 돈을 남기고 편지대로 오후 6시 아틀리에에서 생을 마감했다. 고단했던 구도의 길을 스스로 마감한 것이다. 그의 부고를 들은 지인들은 바로 자살이라고 직감했다고 하니, 그의 자살은 즉흥적인 것이 아닌 이미 준비되었던 것이었다.

죽음 이후 그는 재조명을 받았고 세간이 주목하지 않던 작가에서 안타까운 천재적인 예술가로 그 위치가 바뀌었다. 남겨진 그의 조각은 남다른 대접을 받게 되는데 그가 생전에 자신의 누님에게 했던 “인간의 자식은 언젠가 모두 죽지만 내가 만든 자식(작품)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처럼 죽지 않고 살아났다. 그의 유작들은 흩어져 각 미술관의 대표작으로 소개되고 있는데, 그 중 권진규의 대표작으로 자타가 인정하는 작품이 우리 박물관에 있으니 앞서 언급한 3점이다. 지금도 그의 작품들은 박물관 3층 현대미술실에 전시되어 있는데, 이는 우리 박물관이 그의 작품세계를 먼저 알아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실 권진규는 살아생전에 인정받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죽어서야 인정받았기 때문에라도 그를 비운의 조각가라 부르는지 모르겠다. 당시의 고단하고 외로웠던 그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는 가슴 아픈 에피소드를 전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그는 가고 없지만 그의 작품은 남아 있으니 그의 작품을 통해 한 예술가의 작품세계를 돌아봐 주기를 기대해 본다.

‘어느날 아침에 고인이 눈을 떠보니 간밤, 자기 전까지 있었던 흉상 한 개가 없어졌다. … 그러다가 한참만에야 간밤에 도둑이 든 것을 깨달았다. 잠궈놓은 아틀리에의 문이 열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고인은 안심이 되었다. 도둑이 자기의 조각을 훔쳐갔다면 그것은 고인으로서는 매우 흐뭇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럴 것이 자기 작품의 가치를 아는 도둑이라면 사실 그와 악수라도 하고 싶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후 그런 흐뭇한 감정은 곧 깨어지고 말았다. 아틀리에를 나가 보니 그 잃어버린 조각은 시궁창에 쳐박혀 있는 것이다. 결국 도둑은 버리고 간 것이다. 차라리 그 광경을 안보았더라면 하는 것이 당시 고인의 심정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러한 에피소드를 지닌 조각을 보면서 나는 다시 한번 고인의 외로웠던 예술의 길, 구도의 역정을 눈앞에 그리면서 잠시 코끝이 시큰해짐을 느꼈다.'  < '공간'75호(1973.6)p.12 >

고려대학교 박물관 학예사 배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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