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진규權鎭圭라는 조각가가 있었다. 1942년부터 조각을 시작하여 1973년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그의 삶은 조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시에는 생경했던 테라코타라는 장르를 개척했던 그는 추상조각과 개념미술 계열이 유행하던 1960년대에 인물 흉상들을 통해 독특한 개인 양식을 이루었던 사실주의 조각가였다. 그의 작품은 장황하기보다 소박하고 현대적이기보다
“허목(許穆)의 전서(篆書)는 괴이하니 금지시켜야 합니다.”숙종 8년 서인(西人)인 이조판서 이정영이 숙종에게 청한 내용이다. 허목(1595-1682)이 정치적으로 남인(南人)이기 때문에 서인인 이정영이 그를 비판할 수는 있지만, 어째서 허목이란 사람이 아닌 그의 글씨체가 비판의 대상이 되었던 것일까? 그것의 당시로서 파격적이었던 허목
박물관 1층의 백년사전시실 한 켠에는 본교 교명(校名)의 유래를 알려주는 코너가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고려(高麗)’라는 교명은 인촌 김성수의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민족을 대표하는 대학을 만들고 싶었던 김성수는 교명에 남다른 관심을 쏟았다. 그에게 ‘조선’이나 ‘한국’은 식민지배와 연관된
고려대학교 박물관 회화실 안쪽에는 라는 작은 크기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그림을 살펴보면 위쪽에 참새 한 쌍이 매화나무가지 위에 앉아 있는 모습을 소박하게 표현하고, 아래쪽에 시와 함께 이 그림을 그린 사연을 적어 놓았다.전시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크기가 작고 화려하지 않아 이내 실망할지도 모르는 이 그림은다산 정약용(茶山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품 중에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어 보이는 분청사기 항아리가 하나 있다. 국보 제177호인 이 항아리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사용했던 태항아리로, 정식 명칭은 다.조선 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생명줄인 태반을 도자기에 담아 명당에 묻는 풍습이 있었다. 태가 태아에게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태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 지형이다. 우리 선조는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땅을 한반도(韓半島)라 부른다. 여러분은 이 땅을 보면 무엇을 연상하는가? 많은 생각들이 있겠지만 대체로 호랑이나 토끼와 같은 형상으로 떠올리는 경우가 많을 텐데 아마도 어릴 적부터의 세뇌 효과리라. 아마도 공중파나 지면을 통해 우리
고려대학교하면 떠올려지는 이미지가 있다. 고대인이든 고대인이 아니든 공통적으로 알고 있는 이미지. 막걸리, 민족, 크림슨색, 응원 등등 다양한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항상 빠지지 않고 나오는 상징에 호랑이가 있다. 고려대학교는 호랑이 대학이다. 이건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호랑이는 원래 맹수다. 그런데 우리는 호랑이를 너무 친숙하게 생각한다. 용맹함으로 상징
백주년기념관 1층 백년사전시실 안쪽에는 이란 이름의 빛바랜 원고가 한 묶음 전시되어 있다. 원고지에 빼곡히 적힌 것은 낡아빠진 지질(紙質) 만큼이나 건조한 법조문들이다. 한자가 외국어 취급을 받는 요즘 시대에 조사(助詞) 빼곤 모두 한자로 적혀 있다 보니, 관람객들은 표지도 없는 이 평범한 원고지에 눈길을 주기 보단 앙드레 김이
주위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라면 학교를 오가는 길에 ‘고산자로’라고 적힌 파란 표지판을 보았을 것이다. 고산자로는 대동여지도로 유명한 김정호의 호 고산자(古山子)에서 온 도로명이다.고산자로를 지나 학교로 오면 박물관에서도 고산자 김정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보물 제853호 수선전도 목판(首善全圖 木板)이다. 이 목판은 옛날 서
고대박물관이 살아있다 ③ 혼천시계 한국과학사의 재조명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모두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아는 고대인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사람은 지갑을 한 번 열어보자. 다행히(?) 만 원 지폐가 지갑에 있다면 인자하게 웃고 계신 세종대왕의 뒷면을 확인해 보라. 예전에 교과서에서 본 것 같긴 한데 뭔지는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