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일생이 한국 현대사로 압축되는 사람, 소설가 황석영[사진]. 어느덧 문학 인생 40년을 맞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20세기 한국문학사 최고의 소설가로 선정되셨습니다.

- 잘못된 작품을 발표하지 않아 타작이 없었다는 점과 나이가 60이 다 되도록 젊은 사람 못지 않게 열심히 창작활동을 했기 때문인 것 같네요. 그런 점이 신용 있는 작가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거 같아요. 실력 위주의 한국 문단에서 앞으로도 꾸준한 창작을 하라는 엄중한 요구라고 생각되요.

△「동인문학상」 후보를 거부하신 이유. 
- ‘종신심사위원제’라고 해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 신문을 통해 작가들을 줄 세우는 「동인문학상」이 싫었어요. 뿐만 아니라, 김동인이 홍경희나 이기영 선생 등 한국문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는 다른 일제시대의 작가보다 특출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부했죠.

△「동인문학상」을 거부한 선생님의 행동을 친일 문인의 관계망이나 언론권력의 한국문단 줄 세우기에 편입되기를 거부하는 자세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 저 역시 약점이 많은 평범한 사람이에요. 또한, 실천적 측면에서 비겁했던 적도 있고 주위의 눈치를 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과대평가라고 생각해요. 얼마 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선배 문인들의 친일 행위에 대해 대신 사과한 일은 우리 문학계 스스로 잘못을 시인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권력을 어떻게 보십니까.
- 대개 문학권력의 발생배경은 문학계에서 압제자의 권력을 통해 유사권력을 대행했던 일부의 행위에 있는 것 같아요. 또, 문학이 오랫동안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면서 사회에 저항하는 실체가 점차 권력화 된 것이 아니냐는 식의 논란도 젊은 작가들 사이에 있었던 것 같아요. 이러한 문학의 권력화는 그것이 동시대 사람들에게 올바르게 행사된다고 하면 타당하다고 평가되나, 권력 자체가 남용될 소지가 많다는 점에서 염려가 되기도 해요.

△한국 현대사를 압축했다고 할 만큼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셨는데, 그러한 삶의 과정이 선생님의 문학세계에는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 젊은 시절의 경험이나 생각들이 연장돼 작품에 표현됐어요. 이런 삶이 작가로서는 행운이기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작품에 지속적으로 반영해야한다는 무거운 짐으로 작용했죠.

△올해가 소설을 쓰신 지 40년이 되는 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선생님 소설의 흐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우선 20대부터 베트남 전쟁을 겪기 전까지는 굉장히 개인적이고 탐미적이었어요. 그러다가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아시아인으로서 사회적 정체성을 발견하게 됐죠. 귀국해서 ‘전태일 씨의 분신 사건’을 겪은 이후에는 사회문제에 주목하면서 사회와 소통하게 됐어요. 그 이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하고 나서 내 자신이 변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어요. 감옥에 있는 동안 이를 실행했어야 했는데 글을 못쓰게 하니깐 메모만 하고 있다가 석방된 후 지금까지는 리얼리즘을 풍부하게 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죠.

△집필기간 상당한 공백이 있었습니다.
- 1980년에 방북하고, 그 이후 근 10년 간 망명과 투옥생활로 인해 창작활동을 하지 못했죠. 제가 문학을 정의할 때 인용하기를 즐겨하는 대목이 있는데요.‘문학’은 마치 사랑하는 여인과 같다는 거죠. 가까이 있으면 흉이 보이고 지겹기도 한데, 떨어져 생활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성숙한 모습으로 “여보 나 아직 당신 등 뒤에 있어요.”라며 다가올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작가들에게 있어서도 어느 정도의 공백은 매너리즘이나 문학주의에 빠져들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봐요.

△「한국일보」에 연재하고 계시는 『심청』을 통해 심청의 연꽃을 ‘매춘’으로, 심청이 들어가는 곳을 왕궁이 아닌 ‘화류계’로 표현하셨습니다.
- 우선 『심청』을 통해 아직까지도 제대로 서지 못한 우리의 근대를 담아보려고 했어요. 근대라고 함은 서구 열강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아시아를 포괄시킨 것인데 이를 여자의 몸이 시장의 물건으로 변화해 온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가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고 한 것이죠.

△외국의 문명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해오시는 것 같습니다.
- 서양의 문물에 대해 부정적이기보다 구한말에 세계 열강들이 들어오면서 생긴 위기를 느끼게 됐어요. 우선 구한말 서구로부터의 위기의식은  동도서기(東道西器)의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시작해요. 동도서기는 알다시피 ‘道’는 동쪽 것을 취하고, ‘器’는 서구로부터 도입하자는 논리인데 이제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하다고 생각해요. 반성한 서도(西道)와 거듭난 동기(東器)를 새롭게 형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거죠. 그럼 여기서 새롭게 강조되는 것은 동쪽 그릇(東器)을 제작해야한다는 것이죠. 그것을 위해서는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보편성을 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글쓰기 영역을 넓혀가고 계십니다.
- 젊은이들은 자신들의 취향과 맞지 않으면 읽으려는 시도도 하지 않더라고요. 같은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들의 취향에 맞아야 보거든요. 또한, ‘재미’를 으뜸으로 여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춰서 전략도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거죠. 무작정 옛날 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젊은이들에게 친숙한 소재를 끌어들여 옛날 시대상황을 이야기하게되면 ‘아! 인생이란 이런 것이구나. 이런 일이 있었구나.’하고 가깝게 받아들이지 않겠어요?

△주장하시는 동아시아 연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사실 그것은 1980년대부터 생각해왔던 거에요. 1985년에 처음 출국해 독일에서 열린 ‘제3세계 문화제’에도 참가하고 유럽, 미주, 일본 등지에 문학팀을 조직하기도 했었어요. 그런데 ‘제3세계 문화제’를 보니까 아프리카나 라틴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그 지역 예술가들끼리 서로 연대하고 있었어요. 이런 활동들을 보면서 동아시아에서도 연대가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필리핀 같은 경우는 우리랑 민주화운동이 직결되어 있고 광주에서 운영됐던 ‘민중미술학교’가 실제로 필리핀의 빈민가 일대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니까요. 또한, 망명하고 있을 시절 뉴욕에 ‘동아시아 문제연구소’를 설립했는데 대단히 호응도 좋았고, L.A 사태 때 결속력 있게 대응하는  등의 성과도 있었어요. 미국의 일방적인 패권주의에 대해서 우리 나름의 대응방법의 모색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고, 동시에 동아시아 연대를 주장하게 됐죠.

현재 한국은 분단으로 인해 냉전시대의 유물이 보존되어 있어요. 이런 상황에서 베트남이나 독일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다면 21세기에 문명의 대안을 한반도에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역할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역할도 중요한 것이죠.

△사회 참여적인 소설가로도 이름이 높습니다.
- ‘참여’라는 말을 싫어해요. 사실 글 쓰는 사람들은 현실을 떠날 수 없어요. 물론 ‘순수’라는 미명 하에 현실을 망각한 채 글을 쓴 시인도 있는데, 그것 역시 그 사람의 현실의식에서 비롯된 거죠. 참여 여부 역시 동시대 사람들의 현실에 대한 산물이에요. 그러니까 순수참여니 현실참여니 하는 말의 역사적 뿌리를 캐면 말장난일 뿐입니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겐 미래가 없다.”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 그 말은 제 의도가 약간 잘못 파악된 것 같네요. 오늘의 젊은이들은 과거보다 훨씬 악조건에 놓여있다는 것이죠. 자본의 힘이 점점 거대화되고 거기에 부합되는 조직이 철저하게 권력화 되고 있는 현실은 젊은이들에게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겨주죠.  그런 의미에서 사회적 변화를 끌어내는 데 젊은이들이 주목해야하는 거죠.

△방북 전후에 통일관의 변화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 방북 전후의 통일관이 달라졌다기보다 세계가 변함에 따라 통일에 대한 전술과 전략이 달라졌다고 해야겠죠. 그리고 방북을 하면서 북한의 현실을 제대로 알았기 때문에 북에 대한 입장이나 관점도 달라졌어요. 방북 후 통일을 원치 않는다고 말한 이유는 통일의 기본조건이 성립돼 있지 않는 상황에서 통일만 외치는 것은 통일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처럼 보여지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당장 통일을 주장하기보다는 평화협정 선결과 북에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달 24일 한국을 방문한 베트남 작가들에게 베트남전 참전에 대해 개인 자격으로 사과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저는 이러한 행동이 기본적으로 한국의 지식인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바로 지식인의 기본적인 양심이에요. 제가 물론 군인으로 베트남전에 참여하기도 했지만 한국의 작가로서 베트남 국민에 대한 예의로 사과를 하는 것이죠. 아울러 그런 절차를 밟아야만 서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거죠.

△대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으신 말씀은.
- 현재 대학생들은 ‘소비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제는 거기에서 벗어나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야 해요. 또한 사회 문제 역시 몇 년 후에 자기 자신에게 닥치게  될 문제임을 인식하고, 방임하거나 관심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젊고 유능한 인물이 많은데 왜 나를 만나고자 했냐며 반문하던 그. 인터뷰를 마치면서 그 나이가 무색하리만큼 투철한 작가의식과 열정의 소유자임을 확신했다. 여전히 대중과의 접근을 꾸준히 시도하려는 작가의 모습에서 지난 세월, 삶의 역경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을 감히 짐작해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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