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분배, 유인책으로 해결해야

의료전달체계 복구에 강제성 필요

“장기 계획 부재 시 대학병원 붕괴”

 

박종훈 전 안암병원장
박종훈 전 안암병원장은 대학병원 붕괴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장기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환자를 두고도 의사의 진단은 다를 수 있다. ‘의료 공백’을 앓는 한국 의료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2018년부터 4년간 안암병원장을 지낸 박종훈(의과대 의학과) 교수는 2013년 <청년의사> 기고에서 “대한민국 의료의 수많은 모순 가운데 가장 압권은 의료전달체계의 무질서”라고 진단했다. 그는 “의대 정원 확대를 포함한 윤석열 정부의 ‘필수의료 혁신전략’은 근거가 부족한 처방”이라며 “장기 계획 수립 없이 현 의료 시스템을 방치한다면 대학병원 붕괴 사태가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 필수·지방 의료 공백 원인은

  “사람들이 ‘필수 의료’라는 표현을 자주 쓰는데, 사실 의료 중에 필수적이지 않은 건 없습니다. 많이 쓰이는 ‘필수 의료’라는 표현은 생명과 직결되는 ‘중증 의료’를 의미하는 것 같아요. 과거에도 특정 과는 어려웠지만 시대 정신이나 인생관이 지금과 달랐기에 그런 과에 가는 걸 중시했어요. 젊은 세대가 지향하는 삶의 가치관이 행복을 중시하는 쪽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고난도의 수련 과정이 필요하고 의료사고의 위험성에 노출돼 있는데 그만큼 수익이 높지 않으니 전공을 피하는 건 자연스럽죠. 사명감으로 버틴다 해도 의사 생활 내내 주말 없이 당직을 서는 삶을 감당하기는 어렵습니다.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 이후 의료사고와 소송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 것도 원인입니다. 우리나라 의사들은 다른 선진국보다 형사소송에 휘말리는 건수가 훨씬 많은데 마땅한 보호책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선 2013~2018년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의사를 기소한 건수가 연평균 754.8명으로 활동 의사 수 대비 0.5%인데, 이는 일본 대비 14.7배, 영국 대비 580.6배, 독일 대비 26.6배 높은 수치입니다.

  지방 의료 공백 원인은 복합적입니다. 의사만 부족한 게 아니라 사람이 지방에 없는 거죠. 의사는 어떤 지역에 환자군이 형성돼야 갈 수 있습니다. 신도시에는 신규 의사가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군엔 환자가 없으니 의사가 들어갈 수 없죠. 젊은 의사들이 수도권에 살고 싶어 하는 것도 원인입니다. 한국이 안고 있는 다른 문제와 별반 다르지 않아요. 지방에 가서 살고픈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모든 게 수도권 중심이고 성공하려면 수도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 ‘필수의료 혁신전략’의 문제는

  “‘필수의료 혁신전략’이라는 정부 발표가 상당히 급조된 것 같습니다. 저는 의사 증원 자체에 별 반감은 없습니다만, 의사 증원 목적·이유·활용 방안 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단지 인구 몇천 명당 의사 수라는 OECD 통계만 들이밀고 있습니다. 한국 의료가 나아갈 구체적 방향성을 제시하고 거기에 맞춰 의사 증원 규모를 제시해야 합니다.

  지난 20년간 국내 병상 수가 폭증했는데, 정부가 간과하는 사이 환자는 의료 서비스를 과도하게 이용했고 의사들은 과잉 진료를 일삼았어요. 이미 비대한 의료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의사를 더 뽑아야 한다는 주장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병상이 늘어난 만큼 의료 인력이 더 필요하다는 논지는 출발부터 잘못됐습니다. 이대로 가면 한국 의료는 지속할 수 없습니다.

  지방의대를 중심으로 인력을 지원한다는 정책도 황당합니다. 지방의대를 나온 인재들이 수도권으로 몰리는 상황에서 수도권과 지방의 전공의 비율을 조정하는 대책으로는 해결이 어렵습니다. 그 지역에서 의사 생활을 할 수 있게 하는 토대를 고민해야 합니다. 특히 젊은 의사들은 결혼과 자녀 교육에 관심이 많으니 지방으로 가기 쉽지 않습니다. 저는 정책 방향을 바꿔 자녀 교육이 끝난 세대의 의사들을 끌어들일 방책을 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분들이 훨씬 노련하고 경험도 많으니까요.”

 

  - 의료전달체계가 무너졌다는 말도 있다

  “과거에는 작은 중소병원들이 2차 의료기관으로서 맹장, 발목 골절 등 간단한 수술을 했습니다. 2차 의료기관에서 도저히 안 되는 중증 환자만 3차 의료기관인 대학병원에 갔어요. 이런 의료전달체계는 2000년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어요. 정치인들의 포퓰리즘으로 누구나 바로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는 체제가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허리 역할을 하는 2차 의료기관이 무너진 거예요. 여기서부터 의료 인력 공백이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의료전달체계가 과거처럼 피라미드식으로 올라가면 의료인력 공백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어요. 대학병원이 과거처럼 중증 환자만 보고 2차 병원이 나머지 환자를 보는 거죠. 그런데 지금은 감기에 걸려도 3차 의료기관으로 오면서 대학병원 환자가 어마어마하게 늘어났습니다. 이런 문제를 외면하고 의대 정원을 늘려봤자 대학병원에서 전공의가 수련을 마치고 갈 곳이 없습니다. 정치권이 ‘경증 환자는 대학병원에 가지 말라’고 말하면 국민의 반발이 심할 겁니다. 이런 문제에 손댈 수 있는 건 정부밖에 없습니다. 정부가 국민을 끊임없이 설득해야 하고, 대학병원이 경증 환자를 진료했을 때 제재를 가해야 합니다.”

 

  - 의료 공백을 해결하려면

  “지금까지도 정부는 5~10년 뒤의 장기 계획을 발표한 적이 없어요. 원래 ‘보건의료기본법’에 따라 정부가 ‘보건의료발전계획’을 수립해야 하는데, 이를 한 번도 안 한 걸 보면 정부가 중요성도 몰랐고 전문성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과거엔 장기 계획이 없어도 됐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 의료는 안고 있는 문제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나라 의료 서비스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5년, 10년 뒤엔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도록 정책을 만들고 발표해야 합니다. 대‘ 학병원을 중증 의료 위주로 재편할 것이다’ 같은 계획을 제시해 주면 젊은 의사들이 자연스럽게 정부의 의도대로 움직일 겁니다. 아무 얘기가 없으니 당장 좋아 보이는 전공으로 몰릴 수밖에 없죠.

  지방 의료 공백도 어떻게든 해소해야 합니다. 인구가 적은 군 단위에 좋은 식당이 없는 건 참을 수 있어도 좋은 의료기관이 들어 오지 않으면 주민들의 불만이 커지겠죠. 정부가 그런 지역에 공공의료기관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지역 공공의료기관 근무 조건도 개선해야겠죠. 단순히 공공의대 졸업생을 강제로 지방에 근무시키거나 지방의대 정원을 늘리는 방법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지금 의료전달체계를 개선하지 않으면 조만간 붕괴하는 대학병원이 많아질 겁니다. 중증 의료에 종사하려는 전공의는 없고, 전공의가 없으니 교수도 그만둡니다. 이 공백을 메우려면 고액의 연봉으로 중증 의료 전공 의사와 많은 간호사를 채용해야 합니다. 이런 체제 속에서는 지금처럼 방만하게 운영됐던 대학병원들이 지속할 수 없고, 그 현상이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대한민국 사회가 지향하는 건강한 의료체계를 확립해 발표하고 정부가 변함없이 지지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고 생각합니다.”

 

글 | 정세연 기자 yonseij@

사진 | 하동근 기자 hdng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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