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의 재건, 개혁, 변통, 경장은 17세기 지식인들에게 공동의 화두였다. 16세기말에 국가가 이미 중쇠기(中衰期)에 접어들어 경장하지 않으면 나라가 장차 나라꼴을 갖추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조선 내 선각적 지식인들에게 있었다. 그러나 경장은 이뤄지지 못했고 왜란에 이은 호란으로 사실상 국가가 무너진 것과 같은 상황이었다. 이 때 등장한 것이 ‘포황(包荒)’과 ‘빙하(馮河)’의 정치가, 송시열이었다.

패배의식 타파위해 북벌론 내세워
부역과 조세제도로 당론과 대치해
우암 송시열(1607 ~ 1689)은 “춘추의 대의를 지향했고 무이(武夷)의 학문을 전수했다”는 평가가 보여주듯이 그 학문과 사업이 모두 주자와 이율곡을 계승하였다. 사가들은 우암의 학문적 업적보다는 그가 진행한 사업이 크고 많았다고 평한다. 이는 그가 산림(山林)에서 주자를 ‘독신호학(篤信好學)’한 학자지만 철학이론의 정리나 윤리적 실천 못지않게 그가 펼친 사회 정치 경제적 사업의 성격과 규모가 더 부각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사업과 행적은 그가 처한 논적 정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논해야 그 성격이 보다 객관화된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 평가에 억양이 실리기 때문이다.

△ 포황(包荒)의 의식개혁

송시열은 “마땅히 행할 지상과제를 천명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을 자기의 시대적 사명으로 설정했다. 즉, 대의(大義)의 발굴과 모두가 충심으로 기뻐하며 따를 수 있는 이슈의 개발을 가장 우선적인 것으로 든 것이다. 북벌은 이의 한 축에 해당하는 주요사업이었다. 당시 조선은 양대 전란, 특히 청에 굴복한 상황에서 수뇌부와 백성 모두 ‘이제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상황이었다. 당국자마저도 인순(因循) 고식(姑息)이나 체념적 순응의 삶에 기울어져 있을 때 마땅히 지향하고 추구할 가치의 향방을 제시하고 추진한 것이다. 따라서 훗날 북벌론을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줄 알면서도 고집했다’ 라거나 일종의 정치적 허위의식이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 사업이 갖는 성격상 불가피한 부분이다.
또한 당시는 통치질서가 재편되는 와중이었고, 제세력 집단간의 갈등이 전방위적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집권을 위한 방편으로는 상시적 편파 발언, 음해하는 말, 간사한 말, 곤궁한 논리로 회피하는 언사(?辭 淫辭 邪辭 遁辭)가 횡류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송시열은 “정학을 숭상하고, 이단사설을 멈추게 하는 것”을 처방으로 제시했다. 그에게 있어서 정학은 유학이요, 주자학이며 주자의 정론(定論)이었다. 학술적 논란으로 시비(是非)와 이합(離合)의 혼란 속에 있는 학자들을 위하여 이기심성설에 대한 이론적 정비와 주자 정론(定論)의 확립, <주자대전차의>, <주자언론동이고>, <이정서분류>등의 각종 성리학 관련 대규모 편찬사업은 정학의 확립과 이단 사설의 차단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특히 이단사설에 대한 강고한 입장의 견지는 우왕, 맹자, 주자의 사업에 토대를 뒀고 그 궤적을 같이하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따라서 사문난적의 논란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례 문제 또한 의식개혁의 성격을 갖고 있다. 3년이냐 1년이냐의 예송논쟁은 단순한 숫자상의 논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륜에 있어서 왕가와 사대부가의 보편성을 견지하느냐 특수성을 인정하느냐와 관련된다. 송시열의 기년설 주장 속에 담긴 뜻은 ‘인륜에 있어서는 왕실과 사대부가에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훗날 연암 박지원이 원사(元士)라는 개념으로 최고통치자인 왕도 본질적으로는 선비라고 규정한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밖에 그는 전란 중에 나타난 충의 열사 효정(孝貞)의 사람들을 신분에 상관없이 발굴하여 표장하고 보호했으며 후원하였다. 또 만동묘, 대보단의 설치 역시 대의의 소재를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방안이었다.

패배의식 타파위해 북벌론 내세워
부역과 조세제도로 당론과 대치해

△ 빙하(馮河)의 제도개혁

송시열이 용단을 내려 주창하고 추진한 정치 경제적 개혁과 변통의 사업 중 주요사항은 내수사와 왕실 종가 인척들의 특권적 이원(利源)의 축소와 권횡 견제, 대동법 실시, 향촌안정책, 노비종모법, 반가부녀자 개가 허용, 호란으로 끌려갔던 환향녀의 처리, 흉년구제를 위한 오가작통법, 보오(保伍)법을 꼽을 수 있다. 이 가운데 왕실재정을 담당하는 내수사의 이권 확충과 각종 횡포는 중종 때 조광조 이래로 그 폐단이 지적돼 왔고 율곡도 강력하게 혁파를 주장했던 사안이다. 이는 특히 왕과 종실과 외척 부마 등 최고권력층을 상대로 다투는 예민한 사항이었다.
일반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문제 중 가장 큰 것은 역시 부역과 세금이었다. 대동법의 시행과 관련해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좋아하고 부자들은 싫어하며 시골에서는 좋아하는데 도시에서는 싫어한다는 지방관의 보고는 정확하다”며 적극 시행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그의 이런 적극적 찬동은 그의 스승 김집 등이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당론과 반대되는 의견을 낸 셈이다. 양역(良役)변통론, 각종 호포제의 실시도 같은 맥락에서 추진되었다.
송시열이 주도하거나 시행한 사업은 대부분 유속(流俗)에 의하여 상당한 저항과 제지에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나 집단의 호오(好惡)를 떠나 그의 영향력이 이후 조선조 말까지 200여년간 지속됐다는 사실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유학의 근본정신에 기반한 그의 개혁성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지도자가 사사로움을 잊고 공의를 위해 봉사한다면 우뢰가 울고 번개가 치고 바람 불고 비 내리듯 조야 상하가 크게 부응하게 된다”는 그의 간언은 현 정부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 송시열을 기리기 위해 대전에 세워진 송시열 사당

곽신환
숭실대 교수· 한국철학

-용어정리-
포황 : 더러운 것과 무식한 백성까지 버리지 않고 수용하는 광명정대한 도량
빙하 : 황하(黃河)를 맨발로 건넌다는 뜻으로 위험한 행동이나 무모한 용기를 비유한 말

<우암 송시열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강직한 개혁정치가 vs 당파 이익중시한 사대부

#1. 송시열은 개혁정치가다.
송시열은 ‘송자’로 불리며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최고의 성현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청에 굴복한 조선이 패배의식에 젖어있는 상황을 극복하고자 의식개혁의 일환으로 북벌론을 주창했다. 당국자마저 인순(因循) 고식(姑息)이나 체념적 순응의 삶에 기울어져 있을 때 마땅히 지향하고 추구할 가치의 향방을 제시하고 추진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정치·경제적 개혁으로 대동법, 향촌안정책, 노비종모법 등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그의 영향력이 이후 200여년간 지속됐다는 사실은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유학정신에 기반한 그의 개혁성이 폭넓은 지지를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2. 송시열에게 중요한 것은 결국 사대부의 이익이었다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을 위시한 비판론자들은 송시열이 이미 조선에서 그 기능을 다한 주자학을 정치에 어긋나게 적용해 조선사회의 비극을 잉태했으며, 이는 시대착오적인 소중화사상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한다. 그들에 따르면 당시 시대의 변화 속에서 그가 중요시 여긴 것은 사대부라는 계급의 이익이었고, 서인·노론이라는 당의 이익이었다. 이를 위해 농민과 여성들은 억압받아야 했고, 심지어 송시열은 본관이 다르더라도 동성(同姓) 간에는 결혼을 금지시키기도 했다. 결국 그의 당인 노론은 조선이 망할 때까지 정권을 잡았으나 이는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라 그들의 나라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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