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화백자연화문접시, 明 宣德年間(1426-1436), 上海博物館

지난 1년간 타이완예술대학에서 연구년 기간을 보낼 때 몇몇 교수의 집에 초대받아 저녁을 같이한 적이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음식이 나오는데 화려한 문양이 그릇 전체를 수놓은 커다란 청화백자 쟁반에 싱싱한 생선이 푹 쪄서 나오더니, 튀긴 새우와 채소 등이 소담스럽게 담긴 푸른 청화백자-코발트로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발라 구운 백자,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15세기부터 제작된다. - 碗이 뒤를 이었다. 잠시 후엔 마치 우리 분청사기와 같은 백토분장의 灰釉 그릇에 싼라탕이라는 시큼한 탕이 나오고 겉은 홍색과 녹색, 황색이 어우러진 알록달록한 粉彩에-백자 위에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다시 한 번 구운 자기로 우리나라에선 제작이 되질 않았다. - 안은 청화 문양이 그려진 백자 완에는 달걀과 버섯 등을 같이 넣고 찐 요리가 나왔다. 대만 특산 우롱차는 겉이 새까만 흑유 바탕에 金彩로 장식한 다완에 담아 나왔는데 禪的인 분위기를 내기에 충분하였다. 시대나 지역이 다르면 다른 양식이 나오는 미술사의 극히 기본적인 법칙을 그릇을 통해 재확인할 수 있었다. 

원래 그릇은 만들고 사용하는 사람의 사상, 취향, 미감, 생활 습관 뿐 아니라 신분을 나타내기도 하고 富
의 표상으로 여겨지거나 한 나라의 國富를 좌우하는 중요한 최첨단 산업제품으로서 이를 둘러싼 전쟁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16-17세기 중국도자의 유럽 수출권을 장악하기 위한 포르투갈, 스페인, 네델란드, 영국의 전쟁이 그렇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조선의 도자 장인들을 납치해 간 것도 넓게 보면 이에 해당될 수 있다. 결국 그릇은 그 시대의 사람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통로 역할을 하며 역사읽기의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다.

필자는 만나는 대부분의 해외 박물관,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에게 중국과 확실히 구분 가능한 가장 “한국적”인 그릇이 무엇인 지 물어보는데, 돌아오는 대답 중 상당수가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토기, 발생에서 전개까지 중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려청자가 아니라 삐뚤삐뚤하고 겉엔 온통 검버섯 투성이 뿐인 조선백자였다. 삼국시대 土俑이나 제기, 고려비색과 상감청자에도 우리만의 미감과 정서가 묻어 있지만 중국 그릇과 섞어 놓았을 때 그 누구도 실수 없이 고를 수 있는 것은 조선백자라는데 이의가 없었다.

분채화훼문접시, 청 雍正年間(1723-1736), 上海博物館

그럼 그들은 왜 그렇게 느꼈을까. 약간의 미술사적인 배경 설명을 덧붙이자면 한국미술은 선사 이후 끊임없이 중국과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양식을 받아들이면서, 이를 소화하여 독자적인 미술 양식을 선보였다. 청자 기술을 받아들여 독자적인 상감청자와 비색청자를 선보였고, 청화 안료를 수입하여 한국적인 청화백자 제작에 성공하였다. 그러면서도 조선의 정체성과 사대부의 품격과 의리를 중시하여 명이 망하고 청이 중원의 패자가 되자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급기야는 병자호란이라는 수모를 당하였다. 이후 백여 년 간 아예 왕실용 그릇으로 중국에서 원료를 수입해야 하는 청화백자 대신 철화백자를 사용하였고 전 세계 모든 나라가 분채나 상회자기를 만들었지만 끝내 우리 것만을 고수하였다. 그만큼 조선의 그릇에는 다른 시대보다도 중국과 다른 우리 선비들의 고유한 정신세계가 굳건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들의 눈에 그렇게 비친 것으로 여겨진다.

백자달항아리, 18세기, 국립중앙박물관


필자는 향후 여러 차례에 걸쳐 조선 그릇에 대한 글을 게재할 계획이다. 조선 초기 고려청자에서 조선백자로 어떻게 전환되었는지를 시작으로 19세기까지 각 세기 별 그릇의 제작과 양식, 그릇과 조선인들의 삶에 얽힌 역사적 사실과 그들의 생각과 미감 등을 대표적인 작품들과 함께 소개하면서 독자 여러분과 조선시대 그릇 여행을 떠나볼까 한다.

전문 용어보다는 대중적인 설명을 주로 할 생각이나 도자기 제작에 관련된 과학적 용어 사용이나 역사와 미술사적인 배경설명에서 약간의 전문 용어 사용은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우리 역사와 과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겸비하고 글을 읽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하겠지만 요즘 유행하는 사극을 열심히 본 독자라도 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방병선(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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