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 9일은 28년간 지탱해온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날이다. 그것은 역사적 우연인가 다양한 인과관계의 결과물인가. 역사에 우연이란 있을 수 없다.

베를린장벽 붕괴에는 국·내외적 요인이 상호작용했다. 국내적 요인으로는 ①정치적 면에서 당이 권력의 유일한 소유자라서 헌법상 보장된 기본권이 실현될 수 없었다 ②경제적 면에서는 낮은 생활수준과 느린 계획경제로 인한 열악한 공급상태 ③사회적 원인으로 상이한 생활의 질을 갖은 두 계급(특권층, 일반시민) 사회로의 발전 등을 들 수 있다.

대외적 요인으로는 ①고르바쵸프의 신사고에 인한 체제 선택의 자유 ②1975년의 헬싱키 프로세스는 동방세계의 국가적 존재를 보장하는 대신에 인권존중, 기본권의 보장 그리고 인도적 분야의 공동노력에 대한 요구도 내포했다 ③서독의 통일정책(아데나워의 서방정책, 브란트의 동방정책, 콜의 역동적 통일정책)은 동독을 압도했다.

동독의 통일정책은 이와는 달리 서독과의 분리정책을 감행했다. 초창기에는 1민족 1국가설로 적극적인 통일정책을 폈다. 그러다가 1955년 이후부터는 수세에 몰리자 1민족 2국가설로 최소한 두 나라의 현상을 유지하자는 것을 제안했다. 베를린 장벽의 구축은 이러한 이해관계에서 나온 것이다. 1971년 집권한 호네커는 대독정책에서 2민족 2국가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동독이 서독과의 체제경쟁에서 완전히 승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동독을 지키기 위하여 동·서독이 상호간 외국으로 갈라서자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이와 같은 동독의 국·내외적 조건으로 동독주민들에게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무너지기 시작했다. 1989년 봄부터 1990년 10월 3일 통일이 될 때까지의 시기는 그야말로 극적인 장면의 연속이었다.

1989년 동독의 평화혁명은 비폭력적이고 평화롭게 흘러갔다. 특히 10월 9일은 라이프치히 월요데모에서 국민 승리의 날로 기억된다. 소련군의 개입도 고르바쵸프의 신사고로 없었고, 동독경찰도 군중의 힘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이날 7만명의 “우리는 국민이다”라는 함성은 호네커를 물러가게 했고,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시간문제였다. 11월 4일 동베를린의 알렉산더광장에 50만명이상의 인파가 모여 자유선거, 자유여행 등을 부르짖었다. 급기야는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은 붕괴됐다. 그 후 열흘간 1100만의 동독주민들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독일통일과 유럽통합을 가능하게 했고, 미·소 냉전을 종식시킨 세계사적 사건이다. 유럽을 더 이상 구조적으로 전쟁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독일은 유럽의 통합 속에서 통일의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점점 중심국가로 격상하고 있다. 통일 후유증 문제는 오로지 시간, 인내 및 상호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이다. 40년 이상 동안 상이한 이데올로기와 체제를 가졌던 동·서독은 그 내적 통일에서 보통 1,2세대의 시간이 소요된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은 무엇보다도 삼엄한 경계선이 없는 가운데서 동·서독인들의 자유로운 왕래를 만들지 않았는가. 아직도 분단 상태인 우리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독일 통일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자유·평화통일, 안보와 통일과의 관계, 남북관계의 제도화 문제, 탈북자 보호정책, 선의의 체제경쟁, 북한에 정보제공문제, 북한 인권개선, 통일의지에 관한 문제 그리고 대통령의 역할 등. 이중에서도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한 노력은 필자의 견해로는 북한의 핵무기를 무력화시키며(소련의 멸망은 핵무기의 부족이 아닌 경제난과 자유의 부재에 기인), 북한 주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고, 나아가 통일의 길을 열 수도 있다고 본다.

히틀러와 스탈린 독재체제를 직접 경험한 독일은 어느 나라 보다도 인권을 가장 관심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콜도 인권을 독일 통일의 핵심 중 하나로 보았고, 동독의 인권유린을 엄중하게 질타했다.

독일의 인권교육은 독재체제에 대한 양보와 유화정책으로 인권침해를 제한한다든가 혹은 장기적으로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하나의 환상이라고 가르키다. 인권개선은 인권의 이념에 대한 확신과 그것을 토대로 한 많은 사람들의 힘의 결집을 통하여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인권을 위하여 싸우겠다는 용기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북한의 인권보호도 결국 우리 국민들의 적극적인 북한인권 개선운동으로 전개될 때 그 실효성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

이영기 (본교 강사·북한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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