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피우러 아파트 발코니로 나가보면 으레 동네교회의 걸개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자애로운 인상의 예수를 만백성들이 우러러 보는 그림에 요한계시록의 한 구절.

““내가 속히 오리라””,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무의식적인 난독증이 저 구절을 이렇게 망측하게 읽게 한다.

““내가 속아 왔구나””, ““암튼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아내는 힐난한다. 평소 마음씀씀이가 그렇게 드러나는 거니 행여 집밖에서는 우스개 소리로라도 입밖에 꺼내지 말라고. 불문에 부치라는 충고는 접수하지만, 마음씀씀이 운운에 대해서는 변명거리가 있다. 한국의 일부 기독교인들에게 느끼는 나만의 오해(?)는 세속사회에 끼치는 그들의 불민한 작태들 탓이지 내 버르장머리 탓만은 아니다, 라는. 내 추측으로 나만 잘살게 해주십사, 내 자식들만 명문대 보내주십사 엎드려 절하는 이들의 심사는 ‘암튼’일 거고, 그 심사를 눈치챈 예수의 의중은 ‘속았다’임에 분명하다.

 

요즘 느끼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전형이다. ‘믿음’, ‘소망’, ‘사랑’의 귤이 한국에 건너와서 부박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기복’이라는 탱자가 되고 말았다.

 

황장엽씨가 며칠전 세상을 떴다. 언필칭 주체사상의 대부였다. 과문한 탓인지 생전의 그가 주체사상에 대해서 ‘철학적’ 반성을 했던 글이나 말을 본 적이 없다. 김정일이 자기의 ‘인간중심 철학’을 부자세습하고 독재하는데 악용했다고 정색한 모습을 본 적은 많다. 즉 자신의 망명은 ‘귤화위지’ 때문이라는 건데, 그러면 우리는 그저 비운의 망명객을 추모하면서 김정일-김정은 체제에 대한 경멸감과 증오심만 한차례 더 점검하면 그만인가?

 

‘현실사회주의’라는 말이 있다. 이 ‘현실’이란 말은 내 생각에는 지적 게으름 내지 비겁함의 소산이다. 이 말을 납득하면 스탈린, 김일성 따위의 독재자 탓에 마르크스, 레닌의 과학적 이데올로기가 훼손되었고 아직 ‘진정한’ 사회주의는 오지 않았다는 변명이 따라오게 된다.

이 변명의 궁색함은 대공황이나 엔론 사태를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지 프리드먼과 하이에크의 사상적 기초는 무오류이며, 아직 ‘진정한’ 네오리버럴리즘은 오지 않았다는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하게 들리는 지 잠깐만 바꾸어 생각해 봐도 금새 드러난다.

 

1920년 러시아 혁명 3주년 기념식에서 트로츠키는 ““3년 전 그때로 돌아가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면, 우리는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난 지 3년 만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것조차 이토록 힘겹고 고달픈 일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으리라.””라고 토로했다. 혁명 후 피비린내나는 내전에서 간신히 승리했지만, 피폐해져 버린 소비에트 공화국 앞에서의 그의 토로를 나는 피맺힌 반성으로 읽었다.

그후20년 후 망명지 멕시코에서 암살되기 전 미리 작성한 유언장에서 그는 ““내가 다시 새로이 시작할 수만 있다면 이런저런 실수들을 피하려고 노력할 것은 물론이지만, 내 인생의 큰 줄기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는 프롤레타리아 혁명가요, 마르크스주의자이며, 변증법적 유물론자다. (······) 인류의 공산주의적 미래에 대한 내 신념은 조금도 식지 않았으며, 오히려 오늘날 그것은 내 젊은 시절보다 더욱 확고해졌다.””라고 썼다. 반성하되 후회하지 않는 신념의 전범이란 이런 모습일 것이다.

 

고인의 김정일에 대한 증오심은 스탈린에 대한 트로츠키의 배신감에 비견될 만 하다. 그러나 공산주의의 말 그대로 불구대천지 원수였던 트로츠키는 말년에 바로 그 배반의 땅 소련에 대한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전세계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인민전선을 구축할 것을 호소했었다.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도, 적들과 화해하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하지만 황장엽씨는 자신의 사상을 후회한 것 같지는 않지만, 자신의 적들하고의 화해는 잘 성사된 모양이었다. 오로지라고 해도 좋을만큼 애도의 분위기는 반북주의자들 사이에서만 농도가 짙다.

 

암담한 건 그의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스탠스이다. 생전에 김정일을 미워하는 그 마음 그대로 지난 정권에 짜증을 내면서 전향하지 않고 죽은 그는 현충원에 안장된 반면,국민이 피땀으로 쟁취한 헌법을 토대로 정권을 쟁취/위임했던 전직 두 대통령은 아직도 좌파라는 딱지에 시달릴 뿐더러 그 중 한명은 묘소를 현충원에서 평양으로 이장하라는 야유까지 받는 지경이다.

 

요즘 느끼는 ‘지화역위지(枳化亦爲枳)’의 전형이다. 탱자는 어디 심어도 탱자다.

 

(駑飛)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