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에서 숨쉬는 2만 권의 한국
도서관에서 숨쉬는 2만 권의 한국
  • 임지혜 기자
  • 승인 2010.11.29 0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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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스턴대 동아시아도서관 내부 전경 (사진=신정민 기자 mini@) 

미국 동부 뉴저지(New Jersey) 주, 프린스턴 대학교(Princeton University)에서 우리나라 서적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는 반갑고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한국학 사서로 일하고 있는 이형배 씨다. 이 씨가 일하고 있는 프린스턴의 동아시아 도서관은 한국, 중국, 일본 3개국의 도서를 보유하고 있다. 1972년부터 자료를 수집한 도서 70만여 권을 보관하고 있는 이 곳은 시중에서 구할 수 없는 고문서도 다량 소장하고 있다. 특히 한국 컬렉션은 중국과 일본에 비해 규모면에서 훨씬 작지만 한국학 학술 연구의 기반을 제공한다는 데 의의가 있다. 2년 전부터 이곳에서 사서로 일한 이 씨는 프린스턴 내 유일한 한국인 사서로 2만권에 달하는 한국 관련 서적을 관리한다. 프린스턴 내의 첫 한국학 사서인 지금의 이 씨가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프린스턴대학교 동아시아도서관에서 한국학 사서로 일하고 있는 이형배 씨 (사진=신정민 기자 mini@) 

원래 이형배 씨는 한국에서 영어학과 언어학을 공부했다. 그는 특히 고대 영어와 고트어, 라틴어, 고전 그리스어와 같은 고대 언어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에서 석사 학위까지 취득한 뒤 그는 미국 유학을 계획했고 2002년 예일 대학교(Yale University) 언어학과 박사 과정에 진입했다. 그는 박사 과정에서도 산스크리트어, 고대 게르만어 등 다양한 언어를 연구했지만 한국학을 따로 연구할 기회는 없었다.

미국 유학 3년째에 접어들 무렵, 그가 예일 대학교 스털링 기념도서관(Sterling Memorial Library)의 동아시아 도서관에서 파트타임 일을 하며 도서관과 인연이 시작됐다. 한국 서적이 있어도 한국학 사서가 없어 정리가 되지 않던 예일대에 관리인이 필요하던 차였다. 이 씨는 학부와 석사과정을 거치며 쌓은 풍부한 언어학적 배경 덕택에 한글의 로마자화하기, 한자 읽고 쓰기 등의 테스트를 가뿐히 통과했다. “제가 그동안 공부했던 지식이 도서관에서 쓰일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처음 알았어요. 한국어는 모국어지만 비교를 위해 일본어와 중국어를 공부한 것이 도움이 됐죠” 이후 그는 1년 가까이 한국장서를 정리하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파트타임으로 시작했던 일이 평생 직업으로 바뀌게 된 것은 예일대 동아시아 도서관 큐레이터인 엘렌 하몬드 씨(Ellen Hammond)의 제의 덕분이었다. 당시 하몬드 씨는 예일대가 소장하던 불교 관련 고문서를 한국어로 정리하기 위해 이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고문서 수집으로 유명한 예일대의 바이네키 도서관(Beinecke Library)이 소장한 불교 관련 고문서가 일본 수집가를 통해 흘러들어온 터라 이를 한국어로 정리해 줄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몬드 씨는 이 씨와 함께 이 자료를 한국어로 정리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지만 이 씨는 박사 시험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었다. “일본어로만 정리돼있는 한국 불교 관련 자료를 보면서 정리가 안 된 자료는 사용자에겐 없는 자료나 다름없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이 귀한 자료를 한국 사서 중 누군가는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동안 제가 도서관에서 했던 일과 한국 관련 자료를 돌이켜보니 그 일을 제가 해보고 싶더라고요”

결국 이 씨는 언어학 공부를 그만두고 사서가 되기로 결심하고 문헌정보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씨는 언어학 지도교수에게 사서가 되고 싶다는 이야기를 어렵사리 털어놓았고 지도 교수는 그동안 공부한 것이 사서가 됐을 때 큰 자산이 될 것이라 격려하며 대학원 진학 추천서까지 써줬다. “박사과정동안 1년에 5만 달러가 넘는 학과 지원금을 3년 동안 받고 언어학 공부를 했는데, 갑자기 제가 사서로 진로를 바꾸면서 공부하던 학과에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해요”

이 씨는 예일대에서 박사수료 후 2006년에 뉴욕에 위치한 시러큐스 대학교(Syracuse University) 의 문헌정보학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시러큐스에서 학문적 다양성을 접하면서 내가 한국이라는 주제에 대해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크다는 것을 느꼈어요” 2년의 학위 과정이 마무리될 무렵 프린스턴에 지원했고, 2008년 이형배 씨는 프린스턴 대학교의 첫 한국학 사서가 됐다.

프린스턴대 동아시아도서관에 비치된 2009년에 발행한 고려대학교 한국어대사전 (사진=신정민 기자 mini@) 

이 씨는 한국학 사서가 없었던 프린스턴 대학교의 첫 한국학 사서다. 프린스턴 대학은 지역학을 맡고 있는 사서를 따로 두는 편이다. 원활한 프로그램 운영을 위해서 그에 맞는 사서는 필수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학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서는 그동안 없었던 터라 혼자서 많은 자료를 감당하기 벅찰 때도 있다. 정식 한국학 사서라는 점은 그에겐 가장 큰 보람인 동시에 그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가끔씩 한국학 사서가 없는 다른 이웃 학교에서 한국학 자료에 대해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고 발표를 부탁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제가 하는 일이 단지 프린스턴 대학교뿐만 아니라 더 큰 커뮤니티에서 한국학의 발전에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2년 째 한국학 사서로 일하고 있는 이 씨에게 가장 보람된 순간을 물었더니 지난 해 가을에 있었던 이야기를 꺼냈다. 오레곤(Oregon) 주의 한 교수가 한국의 의학 잡지에 실린 논문을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의 대학 도서관에 문의한 뒤 도서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 잡지는 미국에서 구할 수 없는 것으로 이 씨의 도움이 절실하던 차였다. “이 논문이 그 교수님의 손에 들어가기까지의 경로를 많은 사서들이 지켜봤습니다. 마침내 교수님에게 전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환호했죠. 행방조차 알 수 없던 논문을 사흘 만에 한국에서 받게 돼 기뻐하던 교수님과 함께 즐거워한 여러 사서를 통해 느꼈던 보람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미국에서 한국학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지만 아직도 다른 지역학에 비해 여전히 그 수요의 절대치가 낮다. “프린스턴 내 다른 지역학에 비해 한국학 장서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지 않고 수요 역시 아직은 많지 않아요” 한국학의 규모가 작고 이용자 수도 적은 편이라 장서를 늘리기 위한 예산 확대가 어렵다는 것이 이 씨의 최대 고민이다. 그는 항상 적은 예산 안에서 최대 효율을 얻기 위해 고민한다. 하지만 한국에서 지속적인 지원을 이어나가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다. 특히 독도 관련 도서 지원이 크게 늘었고 요즘은 고구려 관련 도서도 늘고 있다. “한국 정부기관이나 연구기관에선 꾸준히 한국을 알리기 위한 자료를 지원하는데 이는 한국학 연구자료 수집에 보탬이 돼요. 정부에서 의욕적으로 자료를 제공하고 있으니 더 많은 연구를 통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프린스턴의 한국학은 ‘걸음마’ 단계라고 말했다. 첫 걸음을 잘 디뎠으니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표인 셈이다. 프로그램의 규모도 커지고 수강생도 조금씩 증가한다니 반가운 소식이었다. 현재 프린스턴엔 한국어 교수 3명, 한국사 교수 1명, 한국문화 교수 1명이 확보된 상태다. 연구를 위한 자료를 갖추는 것은 이 씨의 몫이다. “언젠가는 이웃 학교들도 한국 자료 수요가 늘어나 컬렉션이 확대되고, 한국학 사서가 늘어날 거예요. 서로의 협력을 통해 더욱 발전하는 그림을 그려봅니다. 아직까지는 먼 미래의 일일지도 모르지만요”

현재 프린스턴의 중국 장서 50만권와 일본 장서 20만권에 비하면 한국 장서 2만권은 규모 면에서 비교하는 게 무리다. 하지만 한국의 성장과 한국학의 연구에 공감대가 형성되어가는 만큼, 이 씨가 꿈꾸는 그림은 그리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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