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에서는 마을 구성원들이 모두 모여 풍년굿을 벌이는 등 일상에 밀접했던 것에 비해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조선 왕실에서 무속 신앙은 주로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기록됐다. 조선 왕조 실록에서의 무속 신앙에 대해 알아봤다. 

중종 원년(1506) 丙寅 十月 庚午에 홍문관 부제학 李胤(이윤) 등이 소를 올려 “소격서, 성수청의 무리들을 모조리 혁파하십시오”라고 말했다.
무속 신앙과 관련된 조선의 관서로는 성수청과 소격서가 있다. 성수청은 국가의 기은을 치르는 국무가 소속된 관서로, ‘기은(祈恩)’이란 왕실의 안녕을 빌거나 기청(祈晴)·기우(祈雨) 등을 위해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치르는 의식이다. 소격서는 도교 의식 중 하나인 재초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됐던 관서다. 이곳에선 조선 초기 왕실의 무사출산과 신생아의 만복을 빌기 위한 각종 기복행위가 행해졌다. 하지만 주자학을 근간으로 하는 조선의 정책상 성수청이나 소격서 등 왕실의 무속 문화는 문헌으로 남아있는 것이 적다. 민족문화연구원 조성산 교수는 “중종 때 소격서와 성수청을 동시에 없애라는 상소가 있는 것으로 보아 동시대에 존재한 기관이라 생각되지만 기록이 적어 두 관서의 구체적인 차이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태종 18년(1418) 성녕대군의 병을 못 고친 국무 가이는 화를 면치 못하다.
무당은 의술과도 관계가 깊었다. 조선 시대에는 의료기관인 활인서에 무당을 두어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구원하는 일을 맡겼다. 김기형(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죽음, 자연재해 등 인간이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일의 해결사로 비춰지는 무당을 통해 질병 문제도 해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며 “이는 의사의 醫(의사 의)가 巫(무당 무)를 밑에 둔 毉(의사, 무당 의)에서 기원한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성녕대군의 병세가 악화됐을 때 국무와 무녀가 그 책임을 져야 했다.

숙종 27년(1701) 인정문에 나아가 무녀의 딸 정 등을 親鞫(친국)하다
드라마에 나왔던 흑주술은 실제 조선 왕실에서도 비일비재했다. 가장 유명한 일화로는 숙종 때 장희빈이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가 죽기를 기도한 사실이 발각돼 처형당한 일이 있다. 이 외에도 중종의 후궁 경빈 박 씨는 세자를 저주하다 발각됐고 인조 때는 소현세자의 빈이었던 민회빈 강 씨가 시아버지 인조를 저주하다 발각되는 일도 있었다.

이렇듯 조선의 왕실에서도 무속 신앙은 많은 역할을 했지만 중기 이후 유학사상에 입각한 무속신앙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궁궐 내의 암투가 결합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배격됐다. 하지만 음성적으로는 이어진 것으로 추측되며 무속신앙뿐 아니라 불교, 도교도 미약하지만 그 명맥이 유지됐다. 조성산 교수는 “주자학의 중세적 합리주의가 모두 담당할 수 없었던 영역들을 이 신앙들이 보완했다고 보인다”며 “그것이 표면적 또는 은밀한 형태로 나타나는지와 같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무속 신앙도 나름의 생명력을 가지고 유지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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