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기간 중 중 국군은 사망 13만7899명, 실종자 14만5000명, 부상 45만0742명, 실종 1만9392명, 포로 8699명이 발생했다. 전쟁이 끝나고 반세기가 지났지만 한국사회는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이 남아있다. 한국사회의 통합과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전사자유해가 갖는 의의는 중요하다. 또, 유해발굴은 유가족의 아픔을 달랠 중요한 계기이다. 또한 유해와 함께 발굴되는 유품도 한국사회의 생활사, 전쟁고고학 등 많이 분야에서 학문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 6․25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수많은 호국영령들은 여전히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름 모를 산야에 잠들어 있다. 이들의 영(靈)을 기리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국가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유해발굴사업에 대해 알아봤다.

12년간 지속한 온 유해발굴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부터 시작됐다. 6․25전쟁 50주년 사업의 일환으로 2003년까지 한시적으로 진행됐던 이 사업은 6․25전쟁 전사자의 유해가 산야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이에 유해발굴이 영구사업으로 추진되면서 2007년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됐다. 이는 미국의 미군 포로 및 실종자 확인 연합 사령부(JPAC)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창설된 국가 유해발굴 기관이다. 2008년 3월에 ‘6․25 전사자유해발굴지원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전사자 유해발굴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10년부터는 비무장지대와 북한지역까지도 발굴조사를 확대하고 있다.

유해발굴은 민간단체에서도 진행되고 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주관했던 ‘민간인 유해발굴단’은 조사본부를 충북대 박물관에 두고 발굴조사를 실시했다. 2007년부터 2009년까지 전국적으로 세 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해 1617구의 유해를 찾아냈다. 발굴된 유해는 모두 충북대 중원문화연구소 유해감식센터로 보내져 감식이 이뤄졌다.

절차에 맞춰 한 단계씩
유해발굴은 4단계로 구분돼 진행된다. 첫 번째 준비단계에서는 발굴가능지역을 선정한다. 참전용사와 지역주민들이 유해를 보거나, 혹은 예전에 유해를 매장했거나 매장하는 것을 목격했었다는 제보를 전부 모아서 발굴지역을 결정한다. 또 산야에 남아있는 개인호와 같은 전투흔적을 찾고 전사(戰史)를 참고해 발굴가능지역을 선정하고 금속탐지기로 실제 전투지역의 발굴가능성을 판단해 발굴지역을 최종 결정한다. 2012년 발굴지역으로 선정된 곳은 서울특별시 서초구를 비롯해 경기도 네 곳, 강원도 다섯 곳으로 현재 후반기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두 번째 유해발굴 및 수습단계에서는 문화재 발굴기법을 적용해 유해를 발굴한다. 대학의 고고미술사학 등 관련 학문을 전공한 인원으로 전문발굴단을 편성한다. 한 구의 유해가 발굴될 때마다 그 자리에서 타블렛PC를 이용해 발굴된 위치의 GPS 좌표와 번호를 지정하고 국방부의 ‘전사자종합정보체계(KIATIS-KIA)’에 발굴정보를 저장한다. 발굴정보에는 유해 잔존율, 매장 깊이, 발굴 부위, 유품 종류, 발굴 정황, 지형지물 등이 모두 기록된다. 발굴된 유해는 가까운 군부대에 설치된 임시봉안소에 모시는 의식을 거행한다.
세 번째 단계에서는 발굴된 유품과 유해의 특징을 정밀 분석하는 감식 및 신원확인을 진행한다. 임시봉안소에 안치 중인 유해의 성별, 연령 등 육안 위주의 감식을 마친 뒤 봉송 전용차량을 이용해 국립서울현충원에 위치한 중앙감식소로 이동한다. 중앙감식소에서는 치아 X-ray, 3차원 스캐너 등을 이용해 전사자의 성별, 연령, 인종 등 개인적 특이성을 분석한다. 분석을 마친 유해는 유전자 비교검사를 거쳐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한다. 미확인된 유해는 합동봉안식 후 중앙감식소 내 유해보관소에 신원확인이 될 때까지 일정기간 보관한다. 발굴된 유해가 UN군일 경우 해당국에, 민간인일 경우 경찰에 인계해 지방자치단체에 전달한다. 얼마 전에는 함께 발견된 유품과 그 지역의 전사(戰史)를 참고했을 때 터키군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발굴됐다. 현재 터키 정부에 인계를 준비하고 있다. 적군인 경우 파주시에 위치한 ‘파주적군묘지’에 매장한다.

시간과의 싸움 이어져
2000년부터 12년간 발군된 유해는 7886구로 이중 국군은 6500여구로 추정된다. 하지만 2012년 8월을 기준으로 신원이 확인돼 유가족 품으로 돌아간 전사자는 79구에 불과하다. 각 지역 보건소에서 6․25전쟁 참전 전사자의 유가족으로 추정되는 직계 가족들에게 채혈을 독려하고 있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민간인 유해발굴감식단 한 관계자는 “전사자 직계 유가족들의 유전자(DNA) 채취 참여가 저조해 발굴된 유해의 감식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전국 시군구 단위 보건소에 가면 유가족들의 DNA시료체취가 가능하니 전자사 가족들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전사자는 젊은 나이에 입대에 직계자손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전사자의 직계가족을 찾지 못해 신원확인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다.

전문기관에서 유해발굴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만 사업성과는 여전히 미흡하다. 지난 10년간 발굴한 유해의 수는 전체의 4%정도로 미미하다. 수많은 전투지역에 비해 소수의 유해발굴감식단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 발굴과장 주경배 중령은 “나라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을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해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군단별로 자체 발굴팀을 만들어 2009년부터 동시에 다수지역을 발굴하고 있다”고 말했다. 매장된 유해들이 대부분 야산고지에 위치에 있어 정밀감식장비를 챙겨 등반하기에 상당히 힘들다. 또 시간과의 싸움이 이어진다. 지속적으로 지형이 변하고 6․25전쟁을 겪은 생존자들의 고령화로 점점 제보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줄고 있다.

민간인 유해발굴단장 박선주(충북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유해발굴은 국가정체성 확립이라는 민족사적인 가치와 더불어 인권이라는 보편적 윤리적인 세계사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실시돼야하며 한반도의 화합과 통일의 큰 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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